그 곳에 여성은 없었다

[노동자를 찍는 여성들2] 철도여성노동자 애환 다룬 <소금> 박정숙 감독

등록 2003.11.23 23:56수정 2003.11.26 10:42
0
원고료로 응원
a <소금>의 박정숙 감독

<소금>의 박정숙 감독 ⓒ 송민성

박정숙 감독이 노동자들의 삶을 영상으로 담기 시작한 것은 94년 노동자뉴스제작단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카메라를 들었고, '활동가'가 되고 싶은 꿈을 그는 영상을 통해 이루고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의 카메라의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그 곳에 여성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이다.

"96년 겨울 노동자영상사업단 '희망'을 만들고 98년부터 대표로 활동하게 되었죠. 일을 하면서 노조 간부들을 많이 만났는데 대표가 여자라고 얕잡아보고, 싫어하고 그랬어요. 그때 깨달았죠, 이른바 진보운동을 한다는 남자들의 여성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노동운동이라는 큰 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그때에서야 했다. 98년 노동환경비디오 <담장안 직업병 담장밖 공해병>을 만들면서 만난 LG전자부품 여성노동자들은 박 감독이 '여성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구체적인 계기가 되었다.

"솔벤트5200에 중독되어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서 여성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담아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한 고민은 현대자동차 식당 여성노동자들을 조명한 <평행선>(2000), 철도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금>(2003)으로 이어진다.

여성노동자 문제는 항상 뒷전에…

a <소금-철도여성노동자 이야기>

<소금-철도여성노동자 이야기>

평소 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숙 감독은 2002년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제안으로 <철도노동자 건강보고서>라는 작품을 찍게 된다. 10년 동안 어용 노조가 꾸려진 탓에 철도노동자들의 현실은 '한마디로 노예의 삶'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는 당연히 좋지 않았고, 그 모습을 담는 박 감독 역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박 감독을 더욱 속상하게 했던 것은 그 곳에서도 배제된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였다. 실태 조사에 여성 노동자의 응답이 단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상황이 좋다고 하는 공무원이 이 정도라면 다른 곳은 어떨까 싶더군요. 그러잖아도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구요.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는 철도노조 측에 기획안을 제출하고 예산을 신청했지만 답은 부정적이었다. 실태 조사에 대한 지원은 해줄 수 있지만 영상에 대한 예산은 없다는 것이었다.

"전년도에 <철도노동자 건강보고서>는 의료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소금>은 전혀 받지를 못했어요. 여성을 위해 할당된 예산이 없었던 거죠. 다큐를 만들어도 고용이나 임금 등 현안을 먼저 다루지, 여성 노동자의 문제는 항상 그 다음이거든요. 그러니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더더욱 나오기 힘들었던 거예요."

결국, 박 감독은 2002년 8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독자적으로 촬영을 하기로 결심했다.

막상 촬영을 시작하고 나니 어려운 것은 비용뿐만이 아니었다.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아이를 맡아줄 곳부터 찾아야 했다.

"승무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강릉으로 부산으로 많이도 따라다녔어요. 강릉만 세 번을 갔어요. 승무원들은 1박 2일 근무를 할 때가 많아서 그때마다 아이를 돌볼 사람을 찾아야했죠."

눈오는 장면을 촬영해야 했는데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어 몇 번이나 눈오는 날을 놓쳤다.

"눈이 오면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보면서 울었어요. 저걸 찍어야 되는데, 찍어야 되는데 하면서요."

'이젠 포기해야 하나'하고 있을 때 강릉의 한 후배가 전화를 했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노라고. 그는 당장 강릉으로 달려갔다. 그때가 2월 말이었고 그는 그해 마지막 눈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아이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경험들을 안겨다 주는 존재거든요. 내 부모를, 그리고 어렸을 때의 나를 되돌아보게 해 주죠.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착해지고 넓어지는 것같아요. 당연히 아이 덕분에 힘들고 불편한 부분도 생기죠.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런 어려움을 깨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의 세살박이 아이는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놀이방에서 지낸다. 박 감독은 말한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 손뿐만은 아니다"라고.

아이를 죽여가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냐고?

육아는 촬영의 장애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철도여성노동자들과 박 감독을 이어주는 공통점이기도 했다.

a

ⓒ 송민성

"여성노동자들은 아이 얘기만 나오면 울음을 터뜨렸어요. 촬영을 도와주던 남성 노동자들은 "사람들을 왜 자꾸 울리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곤 했죠."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 아이를 두고 일터로 나오는 안타까움, 아이가 아프다고 할 때조차 집에 갈 수 없는 미안함 같은 것들은 바로 박 감독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었다. 동시에 그것들은 "남성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무언가"이기도 했다.

"여성 관객들의 경우 함께 마음 아파하고 공감하는 반면 남성 관객들은 의아해하는 것같았어요."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한 남성 관객의 물음은 그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죽여가면서까지 일을 해야하느냐고 묻더군요. 너무 편파적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구요."

박 감독은 "처음에는 어떻게 그런 위험한 질문을 하는지 놀랐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졌다"라며 "나이가 적든 많든 남성들의 전형적인 생각임을 인정하게 됐다고.

"누가 아이를 죽이는 겁니까? 유산을 할 정도로 일을 시켜놓고 떳떳할만큼 비열한 사람들을, 더 비열하게 표현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답을 했었죠. 편파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더 편파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혀져 있었으니까요."

이번 인디다큐 페스티벌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받은 그는 대답을 다른 관객에게 돌렸다. 마이크를 받은 관객은 "남성에게 왜 일을 하냐고 묻지 않는 것처럼 여성에게도 일은 중요한 가치이자 자아 실현의 도구"라는 말로 그의 답변을 대신했다.

당신이 '소금' 같은 존재임을 잊지 마세요

"이 땅의 여성 노동자들이 꼭 필요하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영화 <소금>을 통해 여성 노동자들에게 이 세상의 소금 같은 존재임을 잊지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어떤 자장가

박 감독은 <소금>을 찍으면서 철도여성노동자들의 애환을 꼭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드물게 주제가 <어떤 자장가>가 만들어졌다. <민들레처럼>, <전화카드 한 장> 등을 작사·작곡한 조남혁씨가 만들었다. 그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 마음에 들어했다.

네 살짜리 우리아가 갖고싶다 졸라대는
덜컹덜컹 맴도는 기차놀이 끝도 없는 철로 위로
고된 엄마의 하루도 실려간다 꼬박 스물네시간
엄마없는 잠자리에 길들여진 우리 아가
오늘밤엔 아가야 꿈에라도 엄마품에 안겨오렴
대한민국의 철도일 하는 엄마 네겐 죄인인 엄마
아 정말 무엇을 위해 하루가 가고 또 오는지
아무도 누구도 대답이 없네 모두 돌아앉았네
참 많이 좋아졌다는 세상은 왜 날 외면할까
아가야 엄마는 대한민국의 철도 노동자
/ 송민성
"<소금>을 찍으며 만난 노동자분들이 참 인상 깊었어요. 상대방까지 힘이 나게 할만큼 씩씩하고 멋진 분들이에요."

다음 계획을 묻자 그는 조심스럽게 답한다.

"한센병 여환자들의 이야기를 찍을 예정이에요.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침해 실태는 여러번 보도가 되었는데 거기에도 여성들의 아픔은 잘 드러나지 않았더라구요. 한 분의 인생을 통해 깊이있게 다가가보려고 해요. 이제 그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아무도 그걸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면서 "올해까지는 충분히 휴식을 가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벌써 사전 취재만 세 번 다녀왔다는 박 감독에게는 감출 수 없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