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6

등록 2003.11.25 14:17수정 2003.11.2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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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그렇게 빌어도 신은 아무 기척도 알려오지 않았다. 신들은 모두 돌아앉았거나 이미 이곳을 떠나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성단 옆으로 갔다. 거기에는 금과 구리로 만들어진 초승달 모양의 작은 배가 놓였고 배 안에는 홍옥과 청금석으로 깎아 만든 꿀벌들이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사제장은 그 쪽배에도 절을 올리며 애원했다.


'부적의 신님들이시여, 독침을 달고 적을 무찌를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신 신님들이여, 이제 날아오르소서. 그리하여 적들을 단숨에 쫒아주소서. '

그때 성단 저쪽에서 무슨 기척이 들려왔다. 그곳은 아래층에서부터 원통형으로 뻗어 오른 계단, 성령과 천사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계단이었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가 계단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앞에 꿇어 앉아 얼른 기도를 올렸다.

'그 기척이 부디 응답이게 해주소서. 신들의 대답이게 해주소서. 우르에는 수많은 신들이 살고 계십니다. 우리의 위대한 주신과 수호신께서 자리를 뜨셨다면 다른 신들께서라도 부디….'

그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저 아래쪽에서부터 군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불빛이 새나간 모양이었다. 대사제장은 얼른 몸을 일으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군사들의 횃불이 벌써 계단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가며 성문을 향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사제장은 한 번 더 절을 올린 뒤 계단으로 내려섰다. 군사들이 막 첫 번째 아치성문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는 오른쪽으로 꺾어 이층 지붕으로 내려갔다. 성탑 건축물을 제외한 모든 바닥은 편평한 슬래브였다. 그는 성탑 뒤로 돌아가 그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면 군사들은 곧 철수할 것이었다.


군사들의 말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열 번째의 숨을 내쉬기도 전이었다. 불빛도 어른거려 보였다. 군사들 역시 지붕을 밟아오고 있었다. 그 불경한 발자국으로 성역을 더럽히며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제장은 지붕 끝으로 걸어가 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기에도 횃불을 든 군사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도 군사들의 기척이 더 가까이 다가들었다.

그는 급히 북쪽으로 몸을 돌린 뒤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북쪽 저 멀리엔 니푸르 성지가 있었다. 그는 지붕 끝머리에 우뚝 멈춰 섰고 등을 꼿꼿이 세운 뒤 그 성지를 향해 신 엔릴에게 알렸다.
"신이여, 시간이 없나이다. 설령 검은 머리 사람들이 멸망한다 해도, 모두 사라진다 해도, 부디 이 성탑만은 지켜 주옵소서. 당신의 하인인 이 부르가 희생제를 집전하나이다. 직접 이 육신을 당신께 바치며 애원하나이다. 부디 화를 푸시고 폭풍처럼 돌아오셔서 이 성탑을 지켜주옵소서!"

군사들이 몰려들 때 사제장은 자신의 몸을 던졌다. 마치 넓이뛰기를 하듯 그렇게 멀리 육신을 날려 보냈다. 이상했다. 그 순간 달이 황급히 얼굴을 내밀었다. 꼭꼭 숨어 있던 달이 휘장을 걷고 등불을 비춰주듯이 그렇게 신전을 환히 드러내주었다. 사제장의 몸 또한 그 환한 빛을 타고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놀란 것은 그를 지켜보던 적군들이었다. 공중에서 잠깐씩 멈추는 듯 보이는 사제장의 육신은 머리카락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사제나 현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수염은 희고 길어 몇 자나 되는 듯이 보였고 그 수염이 하늘을 향해 훨훨 날리고 있었다.

적군들은 떨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도 사제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저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흰 수염뿐이었다. 그 흰 수염이 순백의 린넬 천처럼 하늘로 쭉 뻗어 오르는 것이었다. 군사들의 시선은 모두 거기에서 붙잡혀버렸고 그리하여 그들은 그 흰 수염이 마치 폭풍이나 번개를 부르러 달려가는 성난 신으로 보인 것이었다.

군사들은 하나 둘 등을 돌렸다. 공포가 등골에 못으로 박혀들어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소리죽여 그곳을 철수해갔다. 삽시에 썰물처럼 그렇게 빠져나갔다. 성탑 주위로는 곧 정적이 여며들기 시작했다

성탑 주위가 깨끗이 비자 달조차도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고 그 움직임이 성벽을 향해 조용조용 다가갔다.

그는 단 한 사람의 목격자, 부사제장이었다. 그는 멀리서 사제장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달빛이 잠깐씩 공중에 잡아두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사제장은 결국 떨어졌고 자신은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누가 보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수습해야 했다.

그는 대사제장을 업으려고 조심스럽게 어깨를 들어올렸다. 한데 대사제장은 아직도 숨을 거두지 않았고 멀쩡한 사람처럼 입을 열어 말을 했다.

"날 여기에 남겨두시오…."
"아아, 살아 계셨군요!"

부사제장은 하도 고마워 그만 울음부터 터뜨렸다. 그러자 대사제장이 팔을 움직여 자신의 안주머니 쪽을 가리켰다. 부사제장이 옷자락을 들쳐보니 그 속엔 서판이 들어 있었다. 한 귀퉁이도 부서지지 않고 말짱했다. 부사제장은 일단 그것부터 수습하고 다시 사제장을 들어올렸다.

"그만두시오. 난 성탑을 지킬 것이오. 대신 그대는…."

마지막 말은 사제장의 입 속에 남아 있었다. 그때 숨을 거둔 때문이었다. 부사제장의 눈에서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졌다. 그럼에도 그는 얼른 사제장의 손을 놓았다. 우선 임무를 지켜야 했던 때문이었다. 그는 눈물과 임무를 양 가슴에 안고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적군은 그 만신 전 성탑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애도하라, 너 도시여!

전 도시가 차례로 파괴되었다. 군속이나 귀족들은 처형되고 필경학교 선생들은 통역이나 언어교사로 끌려갔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만신 전 성탑뿐이었다. 그것의 파괴는 마지막 차례인지도 몰랐다.

한 음유시인이 성탑을 맴돌며 구슬픈 가락으로 애도가를 읊고 있었다.

"아아, 도시는 파괴되었다.
혼란과 무법과 기근이 넘쳐나는구나.
집들은 부서지고 건축물들은 뿌리가 뽑혀 곡괭이로 갈기갈기 찢겨져갔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죽어가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재물은 약탈되었고 음식과 음료수조차 다 빼앗겼다.
분별도 사라지고 도덕은 혼란에 빠졌다.
신들이 세운 이 나라, 신성한 음식을 신들이 함께 먹던 이 도시, 그 그림자로 검은 머리 사람들의 원기가 회복되고, 넘쳤던 이 도시
그러나 이 도시는 황폐해졌고 사람들은 소 떼처럼 흩어져버렸다.
젊은 남녀는 학살되었고,
그 활력과 북적거림도 고요 속에 묻혀버렸다.
이곳의 관습과 종교적 의식은 더럽혀졌고,
신전은 새끼들을 잃어버린 암소들처럼 참담하게 되었다.
아아, 얼마나 더 검은 머리 사람들은 엎드려 양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음유시인이 이 고통을 외쳐야 하는가.
달콤한 노래에 익숙한 음악가와, 전승과 기쁨만 노래하던 시인들이 어찌하여 유랑하며 비탄에 잠겨 파괴된 도시와 버려진 가족을 그리며 이렇도록 애도가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어찌하여 이곳은 고통 받는 영혼, 참혹한 운명에 놓였는가.
신들이 떠났기 때문이다.
아아 신들이 떠난 것이다.
왜 신은 달콤한 음악이 흐르던 집에서 떠나버렸는가.
어찌하여 신은 그의 공사를 중단하고 구구거리며 따르는 비둘기들을 둥지에서 쫒아버렸는가.
왜 신은 마치 그것이 부정한 것처럼 메(신성한 법칙)를 버리고, 마치 그것이 모든 땅을 위로하지 않는 것처럼 종교적인 의식을 거부하는가.
왜 신은 마치 가치가 없는 것처럼 그것들을 부숴버렸는가.
왜 그는 그곳으로부터 기쁨을 거두고, 비탄에 잠긴 밤과 낮으로 이 도시를 채우고 있는가?
왜 신들은 우르를 파괴하기 위해 소나기와 같이 짓밟는 잔인한 외국인을 몰아왔는가.
햇빛과 같이 대지를 채우던 에키슈누갈 신전이
이제는 항혼과 같이 피묻은 얼굴로 어둠 속에 잠기고
이난나 여신조차 그와같이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
이제 그 신전에도 더 이상 축제가 열리지 않는다.
그 여신이 검은 머리 사람들의 경축을 얼마나 즐겨 하셨던가.
그러나 이젠 그 누구도 그녀를 경배할 수가 없다.
신전 한가운데서 신들이 인류를 인도하고, 가르치고 교훈했던 곳,
신들이 그들의 결정을 공포했던 도시가 이토록 황폐화된 것은
신들이 떠났기 때문이다.
아아 신들이 떠난 때문이다.
우르의 수호신, 달의 신도 떠났다.
신은 그의 아내 닌갈과 함께 그들의 파괴된 신전을 떠났다.
여신 닌갈도 나는 새처럼 우르를 떠났다.
우르는 시련 속에서 외로운 갈대처럼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순결한 대지에 세워졌던
우르의 왕권은
목에 올가미가 씌워져 마치 소처럼 순식간에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불쌍한 이비 신 왕은 집 떠난 참새처럼
그의 도시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군사들 또한 덫에 걸린 영양처럼 패배했다.
아아 그러나, 그러나 들린다
여신 닌갈의 통곡이 들린다.
그녀의 도시와 신전의 파괴,
그녀를 모시는 종교의식에 대한 모독과 억압,
유린되고 흩어진 백성들 앞에 통곡하는 우르 최고의 여신.
오오 여신이여 돌아오소서.
당신의 도시로 돌아오소서.,
외양간을 향한 황소처럼, 우리를 향한 양처럼 부디 돌아오소서.
오오, 검은머리 사람들의 아버지,
아버지 신, 엔릴이시여,
이 파괴된 도시를 다시 세워주소서.
어머니를 떠나갔던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해주소서,
머리 뉘일 곳을 찾아 헤매던 사람을 돌아오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검은 머리 사람들이
다시금 신들의 단을 세우고 음식과 연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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