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따라 처음으로 시골 외가에 내려온 연이는 열 살이다. 태어나 처음 뵙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시골 생활은 지루하고 외롭기만 하다. 거기다가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사람도 못 알아보시고, 아이처럼 변해 연이 물건을 빼앗곤 하신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말만 했다하면 언성이 높아지기 일쑤, 서로 말을 섞지 않으려 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만 감돈다. 연이의 유일한 위안은 엄마와 헤어져 미국으로 떠난 아빠가 사주신 휴대폰뿐이다. 물론 휴대폰은 한 번도 울리지 않는다. 연이가 전화를 걸어 아빠와 통화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연극은 할아버지를 모시러 온 세 명의 저승사자와 할아버지의 밀고 당기는 승강이를 중심으로, 할아버지 친구의 상갓집, 점점 심해지는 할아버지와 엄마의 갈등, 깊어만 가는 할머니의 병세가 얽혀 들며 진행된다.
할머니와 연이의 실종을 계기로 할아버지와 엄마는 그동안 서로의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픈 상처들을 꺼내 놓으며 화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엄마에게 부탁하고, 가족 사진 한 장 찍으시고는 치매 할머니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신다.
연극을 보는 내내 연이의 목소리가 아닌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북한 땅에 아내를 놔두고 아들 하나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오신 할아버지. 지금의 할머니와 새로 결혼을 해 딸 명숙을 낳는다. 바로 연이의 엄마이다.
늘 붙어 다니던 사이 좋은 오빠 연과 여동생 명숙. 어느 날 연못에 빠진 동생을 구하려다가 오빠가 그만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갈등. 딸을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나서 괴로운 아버지, 자신으로 인해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에 늘 죄책감을 느끼는 딸.
결국 명숙은 아무도 몰래 고향을 떠났고,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 갑작스런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자신의 딸 연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전히 아버지와 딸, 두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는 앙금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시간만 덧없이 흘러간다.
늘 기침을 하시는 할아버지, 몸이 영 안 좋으시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 영정 속으로 들어가 버린 친구가 문상을 하러 온 할아버지께 이야기한다. 식구들에게 빨리 이야기하라고, 그래야 준비할 수 있다고.
할아버지는 헛간에 들어앉아 옛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떠날 준비를 하신다. 치매 걸린 아내와 손녀가 없어져 동네가 발칵 뒤집히는 소동 속에서 딸 명숙과 화해를 하게 된 할아버지는 '너를 미워한 적 한 번도 없었다'고 고백하신다.
할아버지의 헛간에는 꽃상여가 있다. 가마니로 옮긴 아들 생각에 가슴이 아파 아내만은 꽃상여에 태워보내려고 준비한 것이라고 딸에게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그 꽃상여의 주인이 되신다.
이 연극은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보는 'KIDULT 연극'을 내세운 연극답게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들을 여기 저기 많이 배치해 놓았다. 영상 특수 효과와 환상적인 장면들, 거기다가 할아버지와 연이의 눈에만 보이는 세 명의 저승사자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오히려 동네의 장난기 많은 아저씨 같다.
그러나 아이들을 너무 의식해서였을까. 시각적인 것에 쏟은 정성에 비해 극의 전달력은 거기에 미치지 못해 아쉬웠다. 평일 낮 시간, 엄마를 따라와 관객석의 대부분을 차지한 어린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그리고 죽음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할아버지 옆에서 좌충우돌하며 연이와 소통하는 저승사자만이 아이들에게는 생생하게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아쉬운 것 또 한 가지는 할머니의 치매를 다루는 방식이다. 기저귀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치매 증상이 심한 할머니는 별다른 치료나 보호랄 것 없이 그냥 집에 머물고 계시는 상태이다.
동네 아이들이 연이를 둘러싸고 놀려댄다. '연이네 할머니는 미쳤대요, 벽에다 똥칠한대요'하고 곡조까지 붙여서 말이다. 막대기를 들고 나와 호통을 치며 아이들을 쫓아보내는 할아버지도, 엄마도, 그 누구도 연이와 동네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병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사람은 말이다…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서 기고, 걷고, 어른이 되면 나중엔 이 할아버지처럼 늙고 난 다음에 다시 처음처럼 아기가 되는 기지…"
연극 안내지에 적혀 있는 문구는 간 곳 없이, 왜 할머니가 저렇게 아기처럼 보채고 투정하는지 아무도 친절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치매라는 병'에 걸린 할머니를 보고 '미쳤다'고 놀리는 아이들, 벽에다 똥칠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아이들은 순전히 어른들의 잘못이다.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도와 줘야만, 사람이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가면서 처음의 그 연약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 수 있는 연극도 소중하고, 노년이 담긴 연극 또한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그러나 다른 세대의 삶을 이해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욱이 노년의 삶은 앞으로의 모든 세대가 가야 할 이미 예정되어 있는 길이다.
노년 이해와 노년 준비 교육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또 이런 연극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때, 그것은 곧바로 세대간의 살아 있는 소통이 된다. 누구나 늙어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이 부정직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바른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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