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지 못한 한(恨), 나라가 풀어줘야

[현장] 문해 학습권 보장을 위한 정책 제안 문해 한마당 열려

등록 2003.11.27 07:55수정 2003.11.2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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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6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문해학습권 보장을 위한 정책제안 문해한마당'

26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문해학습권 보장을 위한 정책제안 문해한마당' ⓒ 김진석

전국 문해(文解) 성인기초교육협의회가 주최한 '문해학습권 보장을 위한 정책제안 문해한마당'이 지난 26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됐다. 한국 문해 교육 현황을 통해 문해 학습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촉구한 문해 마당은 전국 20여 개의 문해 학교에서 5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중앙대 이희수 교수의 '문해 학습 당위성 역설'로 시작된 문해 마당은 교토여대 유아쯔끼 도모야 교수의 일본 문해 교육 현장 사례 발표와 공주대 양병찬 교수의 문해학습권 보장 제안 발표로 진행됐다. 덧붙여 한글날 글쓰기 대회 수상자 시상식과 참석자들의 글 낭독과 문해학습권 보장을 위한 문해학습 공동체 선언문 제창으로 행사는 마무리 됐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소관부처와 재정지원의 근거 규정을 명확히 하는 성인기초교육법 제정 △체계적인 전국규모의 문해실태 조사 및 문해학습권 보장 정책 실시 △전국 300여 개의 비영리 문해학습공동체 적극 지원 △여성 사회교육, 노인복지, 지역사회개발을 위한 핵심사업으로 지원 △유네스코 2차 문해 10개년 계획에 대한 문해 정책과 실천 계획지시 등을 촉구했다.

특히, 한글날 글쓰기 대회에서 수상자들이 '배우지 못한 한'을 담은 글을 낭독하자, 눈물과 한숨으로 공감을 표하는 이들로 좌중이 돌연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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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랏님! 한글 좀 가르쳐 주세요!"


a 지난 10월 9일 청와대 대정원에서 열린 '한글날 글짓기 대회' 참가한 어머니들(비문해자)이 쓴 표어들.

지난 10월 9일 청와대 대정원에서 열린 '한글날 글짓기 대회' 참가한 어머니들(비문해자)이 쓴 표어들. ⓒ 김진석


어릴 때 꿈, 이제서야 이뤘습니다
한글날 글쓰기 대회 으뜸상 수상자 박순옥 어머니의 글

*대구아름다운 학교 박순옥 어머니의 글을 맞춤법에 상관없이 '똑같이' 전합니다.*

내 나이 어리 때 일찍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이럭저럭 살다가 우리가 자라던 일제시대에는 처녀들이 공장을 다닌 다든지 시집을 가지 않고 있으면 큰 변을 당한다고 부모님이 저를 일찍 시집을 보내었다.

그래서 남편도 저처럼 어린 나이에 장가를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이가 어려서 부부애도 몰랐고 거저 시집살이로 일만하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서야 아이들도 태어나고 이렇게 자식들 키우다 보니 어느덧 세월이 이만치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릴 때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 이 한을 되물림 하지 않기 위해 끼니가 없어 죽을 먹으면서까지 자녀 모두를 대학까지 뒷바라지하고 시집 장가를 다 보내었다. 이렇게 세월을 다 보내고 나니 내 나이가 칠십을 넘기게 되었다. ... (중략)...

입학을 했는데 입학실 날 나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날 입학생이 사백명 정도 된다고 하시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 얼마나 큰 용기가 생기던지.

내 나이가 비록 많지만 저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해서 배우지 못한 한을 풀었고 자식들도 해결해주지 않았던 말 못하는 벙어리 심정, 이곳 대구아름다운 학교 우리학교 선생님들이 다 풀어 주셨다.

나이가 너무 많아 공부하는데 힘도 많이 들었지만 밤도 새워가면서 국어, 수학, 학자, 영어를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은 모두 배우고 익히고 다시 암기도 하고 모르는 것은 학교에서 가면 다시 선생님께서 귀찮을 정도로 묻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영어 알파벳도 잘 읽고 쓰기도 하고 한글 간판을 자신 있게 다 읽는다. 요즘은 수학공부에 흠뻑 빠져 덧셈 뺄셈은 자신이 있고 곱셈 구구를 외워서 곱셈도 척척 계산기 없이도 잘 풀고 나눗셈도 어렵지만 신나게 배워 풉니다.

선생님께서 빨간 색연필로 맞다고 동그라리를 해 주실 때는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지 또 한 개가 틀려서 이것은 다시 풀어 보세요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으면 속상하면서도 더 잘 풀어서 칭찬도 받아야지 하는 다짐도 생깁니다.

몸이 늙어서 안 아픈데도 없는데 공부할 때면 신통한 약을 먹는 듯이 힘도 나고 신이 나고 학교 가는 날만 기다려지고 오늘은 또 무엇을 가르쳐 주실까 하는 기대로 학교애 갑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 김은성


"문해 교육은 개인의 권리이자 사회의 의무"

중앙대 이희수 교수는 한국 성인 인구 중 중졸 미만 학력자가 420만 명에 달하고, 초등학교 6학년 수준 미만의 비문해자들이 약 20%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로 눈을 돌리면 15세 이상 인구의 5명 중 1명은 '비문해인'이고, 그 중 3분의 2가 여성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평생 학습과 지식 경쟁 사회의 기본인 '문해'가 개별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자산'으로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문해학습'은 전 지구적 공동 과업이라며 개인의 권리인 동시에 사회의 의무임을 강조, 국제적 공동 연대를 촉구했다.

교토여대 유아쯔끼 도모야 교수는 "차별과 빈곤으로 인해 빼앗긴 문자를 되찾아오자"라는 일본 문해 운동의 정신을 소개하며 문해 학습에 관한 일본 정부의 종합적 시책이 없음을 설명했다. 하지만 '인권교육 및 인권계발 추진에 관한 법률' 규정에 의해 정부와 지방자체에게 약간의 보조금을 지원 받는 일본의 문해 운동은 한국과 달리 국가의 진지한 관심에 의해 점차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라고 밝혔다.

a 강의를 듣는 참석자들의 진지한 자세

강의를 듣는 참석자들의 진지한 자세 ⓒ 김진석

공주대 양병찬 교수는 문해 교육권이 비문해자들의 당연한 권리임을 주장하며 비문해가 개인적으로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어 양 교수는 문해 교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 환기, 법적 근거 규정 명문화에 따른 행정 체계 정비, 문해 교육센터 확충 및 지원센터 설치, 교사의 전문성 확보 등을 정책으로 제시했다.

전국 문해·성인기초교육협의회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작년 5000 만 원에 이어 금년의 4000만 원을,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금년부터 중고 PC와 컴퓨터 전문 강사 등을 지원 받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김누리(32) 대리는 "문해교육단체들이 내는 목소리가 단순한 주장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기틀을 마련해 제도화시키는 성과를 내고 있다"며 "앞으로 합당한 시민 운동으로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다른 여성 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어머니(노인 여성)'들의 비문해 문제를 간과했지만, 이젠 정부의 꾸준한 관심과 지원 아래 문해학습 제도가 명확히 정착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이병하(40) 부장은 우선 소외된 계층의 정보화 교육 일환으로 접근했지만, 내년부터는 문해교육 기관들과 협의해 좀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안들을 마련할 계획이라 말했다.

또 그는 일선 전문가들의 간담회를 통해 전국 문해교육 및 비문해인들의 체계적인 실태 조사, 문해 교육을 위한 교과서 만들기, 실질적인 지원센터 마련 등 단순한 정보화 교육 외 다양한 차원의 접근을 시도할 예정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비문해인들을 위한 정부 기관과 정책이 거의 미흡한 실정이다. 전국의 문해 교육 관련 단체들은 대부분 민간인들의 자원봉사로 이뤄지고 있다. 또 실제로 비문해인들이 자발적으로 교육기관까지 찾아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보 접근에서 소외된 비문해인들과 자원봉사 체계로 힘겹게 유지되는 문해 교육 현장에 정부의 진지한 관심과 꾸준한 지원이 시급할 따름이다.

"가난한 사람 마음, 가난한 사람이 잘 알죠"
전국 문해 ·성인기초교육협의회에 2억 기부한 유옥선씨

▲ 남편의 유산 2억원을 기부한 유옥선씨
ⓒ2003 김진석
1남 1녀를 둔 유옥선(55)씨는 얼마 전 운명을 달리한 남편의 유언대로 집을 팔아 마련한 돈과 남은 재산을 합쳐 2억 원을 전국 문해 · 성인기초교육협의회 회관 건립비에 기부했다. 유씨는 기부를 하며 먼저 떠난 남편이 생각났는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이 옆에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좋은 날, 남편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정말 너무 보고싶어서…."

기부금은 유씨 남편의 유언이자 부탁이었다. 성균관대 정외과를 다니며 고학을 하던 유씨의 남편은 끝내 가난에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 후 학업 중단을 가슴에 묻은 채 남편은 개인 사업에만 전념한다.

"나도 여기 계신 어머니들과 똑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쟁이 터져 졸업을 못했죠. 근데 남편은 단 한번도 절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적조차 없어요. 오히려 항상 저를 높여주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죠."

유씨 또한 초등학교는 물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것에 평생 가슴이 아팠노라 말했다. 특히 그는 교회에서 무슨 중요한 일을 할 때마다 행정적 업무까지 맡게되면 지금도 떨린다고 덧붙였다. 빈 손으로 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사람이라며 남편에게 유언으로 기부금 부탁을 받았을 때 유씨라고 흔쾌히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자녀들도 있고 더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낼 거라는 생각에 고심을 했던 것도 사실.

"오히려 있는 사람들이 더 가지려 한대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을 더 잘 알기에 도울 수 있는 거예요. 많이 배운 사람들이 우리 같은 이들의 처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는 "배우지 못한 한은 나랑 똑같을 것이다" 며 "건강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어르신들을 격려했다. 이어 그는 실제 문해 교육 현장에서 무료로 일하며 고생하는 선생님들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라며 문해 교육에 작은 '밀알' 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또 유씨는 국가의 무관심으로 소외된 비문해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이 잘 모른다며 문해자들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을 당부했다.

"여보! 당신의 유언대로 실천했어요. 이렇게 감동스러운데 같이 있었으면 정말 좋을텐데….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마지막으로 사랑해요!"

그는 남편이 떠나고 나서야 '여보' 와 '사랑한다' 라는 말을 처음 한다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만의 가족보다는 '우리' 를 위해 '사회에 환원' 하고자 하는 고인의 마음을 전했다. / 김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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