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김비아
중학교 2학년 여름, 가족들과 함께 처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법계사에서 1박하는 날 비가 새어 새벽에 깨어서 텐트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일, 세석평전의 들꽃, 길목마다 버티고 섰던 고사목. 내려다보면 겹겹의 산들, 자욱한 안개. 그 후로 많은 곳을 다녔지만, 지리산은 여전히 특별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다. 어린 마음에 느꼈던 그 산의 거대함과 신비는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스쳐가며 들었던 가슴저린 역사의 한 토막은 내 기억 속 지리산을 더욱 특별한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마지막으로 갔던 때가 1993년, 대학 1학년생이었던 스무 살 여름이었다. 그 후로 꼬박 십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이 서른이 주는 무게감. 지난 10년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던가.
나는 현실주의자는 못 되었다. 세상은 내게 이해되지 않았으며, 한없이 불공정했고, 알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나는 늘 그것과 대립했고, 그러면서도 늘 방관자였고, 그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오랫동안 가르친다는 것에 대하여 대체로 절망해 있었다. 이상은 높았으나 현실에선 끝없이 패배했고, 힘겨운 학기가 끝나고 찾아오는 방학이면, 그것을 탈출구 삼아서 되도록이면 멀리, 나라 밖으로 여행하는데 보냈다. 서른, 비로소 나는 내 안의 작은 가능성을 믿게 된다. 절망과 희망 사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반복, 그 길을 지나 어쩌면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흘러갈 수 있을 것도 같다고, 현실에서 이상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생각.그렇게 한 발 한 발 나아갈 거라는 다짐들. 서른이란 나이는 그동안 내게 기피의 대상이었던 세상을 다시금 내 앞에 펼쳐서 보여준다. 긴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온 여행자의 마음으로 나는 지리산에 와 있었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다소 험한 중산리 대신 백무동 코스를 선택했다. 토요일 오후에 일을 마치고 저녁 어둠이 깔린 후에야 백무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룻밤 자고 다음날 새벽 6시반에 산행을 시작했다.
백무동에서 천왕봉까지는 왕복 약 17㎞, 길을 걷는 내내 행복하다. 이 산이 나를 받아줌이 고마웠고, 그와 호흡을 공유하며 그의 몸 위로 한 걸음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내게 신선함, 자유, 활기를 선사한다. 아니 지리산에 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뻤다. 십 년만의 재회인데 어련하리.
길이 좋아 어렵지 않게 1808m, 장터목 산장에 도착했다. 산은 이미 겨울이라 쉴새없이 찬바람이 몰아쳤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로 겹겹이 펼쳐지는 산자락은 역시나 지리산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아름답다. 겨울을 앞두고 옷을 벗은 산은 그 몸의 선과 근육 하나하나까지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구비구비 섬진강 줄기가 내려다 보였으며, 푸르게 푸르게 펼쳐진 산들의 끝은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