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걸인은 구걸 하지 않는다

구조조정의 부산물, 일본 걸인... 정신적 치유 우선 필요

등록 2003.11.28 03:56수정 2003.11.2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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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도쿄의 한 공원안에 종이박스속에서 살고 있는 일본의 걸인

도쿄의 한 공원안에 종이박스속에서 살고 있는 일본의 걸인 ⓒ 유용수

일본에서 처음 맞는 겨울의 어느날, 출근 중 우연히 전철역 철로주변 철조망 옆에 종이박스를 방처럼 만들어 놓고 빨래줄까지 치고 사는 일본 걸인을 발견했다. '일본에도 걸인이 있구나' 하는 신기함에 출근 때마다 눈여겨 보았다.

그는 늘 바쁘게 오가며 가끔씩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허공에다 대고 화를 내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제 정신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맨션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그는 "주로 빵가게나 수퍼에서 기일이 지난 빵이나 음식을 박스에 넣어 밖에 놓아두면, 한밤 중에 가서 꺼내 먹기 때문에 굶어죽을 염려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또 하나 걱정스러웠던 것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였다. 아무리 일본의 날씨가 한국보다 춥지 않다 하더라도 바다가 가까운지라 바람이 세고, 습도가 높아 기분 나쁘게 음산하고 춥다. 더구나 그 해는 예년에 비해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 걸인이 걱정됐다. 가끔씩 아침 해가 났지만, 골판지 한 장을 덮고 자던 그를 그대로 두면 얼어죽지 않을까 괜스레 조바심이 났다. 고민 끝에 결심을 했다. 한국에서 이삿짐으로 붙여온 솜이불과 담요를 자전거에 실었다.

자전거 뒤에 싣기에는 상당한 부피였지만 줄로 겨우 안떨어지게 동여매고 뒤뚱거리는 자전거를 끌고 그가 거처하는 종이박스 움막(?)을 찾았다. 그가 눈이 휘둥그레 쳐다본다. 나는 솜이불과 담요를 그에게 주며 "추워질테니까 쓰라"고 말했다. 그가 뭔가 중얼거리듯 입술을 움직이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고맙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 출퇴근을 하면서 볼 때마다, 여전히 이불과 담요는 내가 짐을 내려놓았던 그 상태 그대로 였다. 이거 정신나간 사람에게 괜히 아까운 이불과 요만 준 게 아닌가 싶었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는 요긴하게 쓸 수 있었는데 말이다.

a 전철역에서 쓰레기통속의 잡지를 꺼내는 여자 걸인

전철역에서 쓰레기통속의 잡지를 꺼내는 여자 걸인 ⓒ 유용수

한 달이 지나도록 이불과 담요는 그대로 방치됐다. 그는 여전히 골판지 상자를 펴서 깔개로 사용하고, 다른 골판지 조각을 덮고 자고 있었다. 결국 제 정신을 가진 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차츰 그에게서 관심을 멀리했다.


해가 지나고 눈까지 내리던 어느날 아침, 나는 놀라운 눈으로 그 걸인의 움막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준 솜이불을 깔고, 담요를 덮고 그 위에 다시 골판지 상자를 덮은 그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리부터 이불과 담요를 쓰면 정말 추위를 견디기 힘들테니까 견딜 수 있을만큼 견디다가 이윽고 본격적인 겨울이 진행되니까 이불을 사용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정신나간 사람인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야생 속에서도 너끈히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지혜로운 인간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후로도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거의 매일 그를 보았다.

오늘도 도쿄 한복판 번화가의 한구석에는 걸인들의 삶터가 보인다. 공원 안에서 그때와 조금도 변함없이 골판지로 벽을 만들고 그 속에 자고 일어나는 도쿄의 걸인들.

걸인을 일본말로 '고지키'라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들을 '홈리스'(homeless)라고 부른다. 이는 단어 뜻 그대로 '집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말로는 노숙자라고 할 수도 있지만 뭐라고 호칭을 쓰든 그들이 걸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걸인들과 달리 구걸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의 생계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극히 일부는 자기 저금 통장을 헐어 홈리스(homeless)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한 걸인들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 경제 침체로 일거리가 없어지거나 갈 데가 없어진 도시 노동자, 그것도 평균 나이 55.9세의 중장년들이다.

일본 후생성 공식통계에 의하면 걸인의 숫자는 2003년 2월 2만5296명에 이른다. 이는 1999년 2만451명에 비해 불과 약 5000명이 늘어난 수이다. 그러나 그동안 더욱 심해진 불황의 여파를 감안할 때 이같은 공식 통계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 홈리스돕기 민간단체에 따르면 걸인의 수는 도쿄안에서만도 이미 15만명을 넘어섰으며, 일본 열도전역에는 50만명선에 근접할 것이라고 한다.

조사 결과가 이러한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걸인의 기준에 관한 이견 때문이다. 정부는 걸인을 최소한 한 달이상 거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반면, 민간단체는 하루라도 걸인 생활을 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a 지하철역입구에서 주운 잡지를 팔고 있는 걸인과 잡지를 사려는 행인

지하철역입구에서 주운 잡지를 팔고 있는 걸인과 잡지를 사려는 행인 ⓒ 유용수

그들 가운데는 자립을 시도하는 걸인들도 있다. 그들은 각 역마다 있는 쓰레기통을 뒤져 읽고 버린 만화, 주간지들을 회수하여 가판대에 진열해 놓고 판다. 한권에 300엔 정도하는 새로운 잡지를 대개 100엔(약 1000원)정도에 판다. 일본 젊은이들에게 주간지나 만화 등은 일종의 인스턴트 식품이다. 전철에 오르기 전에 가판대에서 사서 전철을 내리며 쓰레기통에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더럽지는 않다.

걸인들이 이것들을 열심히 모아 주요 전철역 주변에 가판대를 설치, 행인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거지 조직이 있으며 개중에는 샐러리맨이 부럽지 않은 소득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계를 유지하는 걸인들 역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의 걸인들은 생계수단이 없다.

올해 10월 들어 일본 오사카에서는 걸인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국제적인 스트리트 페이퍼로 알려진 <빅이슈(Big Issue)>지의 일본판이 발간이 되었다. 200엔에 팔면 매입가 90원을 제외한 110엔이 걸인들 몫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시작이 되어, 일반화 되기에는 긴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걸인이 된 이들의 대부분은 소위 회사에서 짤린 중장년층이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도 없다. 즉 이들은 거품경제가 끝나면서 명예퇴직, 감원, 부도, 도산 등으로 일본 경제에 불어닥친 구조 조정의 부산물인 셈이다.

불황과 늘어나는 기업 도산의 여파로 사회로 튕겨져나와 도시의 한구석에서 바퀴벌레처럼 서식하고 있는 이들 일본인들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a 이케부쿠로역안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걸인

이케부쿠로역안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걸인 ⓒ 유용수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도 일을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구청에서 보조금과 직장을 소개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 대부분은 일종의 정신적인 치유가 필요한 환자로 보는 편이 낫다. 이미 사회에서 활동할 최소한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신을 부양 하기에는 일본 사회가 너무 미약하다. 물론 이들을 돕기 위한 민간단체의 노력은 대단히 헌신적이다. 그러나 몇몇 뜻있는 시민들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충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현실이다.

뿐만아니라 이들은 때로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고 백안시 당하며 폭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난 1994년 옴진리교 사건 이후, 걸인들 속에 옴진리교 신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폭행과 테러의 희생자가 됐다. 또 불량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이들에 대한 집단폭행이 유행처럼 번져 수난을 겪기도 했다.

오늘도 전철역과 도시의 공원 어디에선가 움막을 치고 살아가는 걸인들을 보며 '도쿄의 한구퉁이에서 쓰레기 같은 인생을 전전하다, 결국 시체덩어리로 변해 의과생들의 실습용 도구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괜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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