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재-정령치] 돌멩이 둘, 하나는 당신을 위하여

아이들과 함께 하는 백두대간 종주 3

등록 2003.12.03 08:25수정 2003.12.0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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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삼재-정령치 구간을 갑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백두대간 종주 첫날입니다. 5년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초·중학생 39명이 함께 하는 산행입니다.

고맙게도 성삼재의 하늘은 맑습니다. 혹시 입산금지라는 말이 나올까봐 급하게 능선으로 붙습니다. 발 밑으로는 하얀 구름이 평화롭게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가볍게 몸을 풀면서 산으로 듭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산길을 가면서, 지난 3일간의 중산리 생활을 떠올립니다.


당신, 기억하시는지요? 지난해 8월 6일부터 전국에 쏟아진 폭우를…. 3일간 내리 쏟아진 호우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물에 잠겼습니다. 인명과 재산 피해가 국가적 재난으로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그 여름의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6일 아침, 나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백두대간 종주팀을 이끌고 파주를 출발했습니다. 지리산 주능선 천왕봉-성삼재 구간을 종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해째 연거푸 물에 잠겨본 파주의 학부모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너무나 당당한 나의 호언장담에 그저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고 왜 걱정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한 학기 내내 공들인 대한민국 최초의 중학생 백두대간 종주가 시작도 하기 전에 동력(動力)이 끊기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4일 중 하루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까닭입니다.

천왕봉 밑 중산리에 도착한 나는 각오한대로 또 한번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호우경보가 쏟아지는 중산리 계곡 민박집에서 아이들의 부모님께 일일이 전화를 드렸습니다. 밥만 해먹다 가더라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겠다고 말입니다.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은 점점 물에 잠겨 가는데, 아이들은 이 방 저 방으로 뛰어다니면서 해방감을 만끽합니다. 결국 3박 4일의 마지막 날 새벽 2시에 아이들을 깨웠습니다. 부랴부랴 점심밥을 싸들고 물에 잠긴 진주를 빠져 나와 성삼재로 왔습니다.


느릿한 길이지만 대열은 마냥 길어집니다. 20분을 못 가서 대열을 정비합니다. 자꾸만 뒤로 처지는 준영이의 짐을 나누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60L짜리 배낭이 빵빵합니다. 네 명의 짐을 더 넣었답니다. 번갈아 배낭을 메기로 했답니다. 게다가 이상한 냄새까지 납니다.

배낭을 열어보니 취사도구도 들어있고, 고추장, 젓갈, 김치 등이 흘러나와 범벅입니다. 달랑 물통과 먹을 것과 우비만을 넣도록 했건만, 확인을 못한 나의 잘못입니다. 대충 쏟아진 음식물을 버리게 하니, 짐이 가벼워졌다고 배시시 웃습니다.


다시 길을 가다보니, 슬며시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전학을 온 지 채 한 달이 안 되는 준영이가 짐을 떠맡았기 때문입니다. 덩치는 크지만 비만형인 준영이는 천성이 순해서 약삭바른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달랑 맨몸으로 길을 걷는 3학년 네 명을 앞으로 불렀습니다.

"봉사 어때?" 이 친구들은 눈치가 빠릅니다. 얼른 후배들의 배낭을 벗겨냅니다. 갑자기 횡재를 한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마냥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고마움이 넘치는 산길을 걸으니 마음이 참 유쾌합니다.

그렇게 성삼재를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서 고리봉에 올라섭니다. 멀리 노고단 정상과 지리산 주능선이 파란 햇살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8월의 햇살이라 만만치 않습니다. 연신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땀방울에 익숙지 못한 아이들의 표정이 꽤나 심란합니다.

한참을 쉬고 있는데, 빗방울까지 후두득거립니다. 출발 5분전을 외칩니다. 1분도 안되어 대열이 움직입니다. 처음 산행을 따라나온 몇몇 아이들이 5분전인데 왜 벌써 가느냐고 따집니다. 즉시 다른 아이들의 대답이 나갑니다. 3분전이나 5분전이나 곧장 출발이라고. 나도 한마디 거듭니다.

"시에서 말하는 함축적 의미,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구별할 줄 알아야지!"

10시. 묘봉치를 지나면서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합니다. 종주 대원 39명 중에는 우리 파주중학교 세 분 선생님과 학생들 외에도 다른 학교 학생도 7명이나 있습니다.

백석초등학교 3학년 박하람, 송포초등학교 5학년 김재준과 3학년 김경미 남매, 봉일천초등학교 5학년 고한호, 월롱초등학교 6학년 백운해, 인천 계산중 3학년 신언호, 파주여중 3학년 신다솜 등이 그들입니다. 모두 스스로 백두대간 종주를 선택한 의지의 청소년들입니다.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형과 누나들은 힘들어 죽겠다고 끙끙대는데, 초등학교 3학년인 하람이와 경미는 마치 소풍을 온 듯이 신나는 표정입니다. 가끔 예쁜 꽃들을 만나면 이름이 뭐냐고 묻는데 대답이 참 궁합니다. 자주 만나는 야생화 이름 정도는 꼭 알아두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만복대로 가는 길목에 억새밭이 펼쳐집니다. 마침 빗줄기가 그어집니다. 억새들이 낮게 깔려 있는 평원에서 점심 보따리를 풉니다. 조별로 앉아서 점심을 먹는데 투덜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까 준영이가 냄새나는 음식을 버리면서 밥까지 모조리 버렸다는 것입니다.

각 조에서 간식과 음식을 날라 왔지만 녀석들이 먹지를 않습니다. 동생들에게 미안한 모양입니다. 할 수 없이 내가 밥을 먹여 줍니다. 마른 김에 밥과 김치를 크게 말아서 한 덩어리씩 입에 물려줍니다.

a 만복대 정상에 선 아이들, 만인의 복을 위한 희망이다

만복대 정상에 선 아이들, 만인의 복을 위한 희망이다 ⓒ 신종균

12시. 오늘의 정상 만복대에 올랐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추운 기색이 역력합니다. 아침나절에는 더위에는 시달리고, 한낮에는 추위에 떨어야 하는 8월의 만복대입니다. 정상에는 돌탑이 서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소망이 덤덤하게 쌓여 있습니다.

돌멩이 둘을 집었습니다. 하나는 파주마루의 백두대간 완주를 기원하며, 또 하나는 당신의 평안을 위하여 올립니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의 주인공 양생처럼 당신을 가슴에 안고 하산을 시작합니다.

만복대에서 정령치까지는 한 시간 남짓한 내리막길입니다. 조금씩 지쳐가던 아이들이 신작로처럼 이어지는 길에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빗속에서 웃고 떠들며 가다보니 어느새 정령치가 내려다보입니다.

환호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따갑습니다. 모두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산을 내려섭니다. 일일이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격려합니다.

이 뿌듯함, 성취의 기쁨. 아이들이 마냥 예쁘고 당당하게 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한 순간입니다. 바로 이 맛입니다. 이 맛 때문에 나는 산행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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