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라지만 캐본 부실한 심마니

지리산기행3-하늘이 처음 껴안는 땅 농평마을

등록 2003.12.04 11:53수정 2003.12.0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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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없는 건지, 눈이 뒤꼭지에 붙었는지…. 벌써 지리산에 탯줄을 묻은 지 40년이 지나고, 심마니 생활로 10년은 족히 보냈건만 산삼구경 한번 못해보고 산도라지만 실컷 캤습니다."

약초를 캐러 산에 오르는 털보 심마니 인제씨
약초를 캐러 산에 오르는 털보 심마니 인제씨김대호
이 부실한(?) 털보 심마니 이인제(40)씨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농평(農平)마을(해발 803m)에 산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알려진 심원마을(750m)보다 50m 이상은 높은 곳이지만 겨우 일곱 가구 사는 작은 마을이다 보니 외지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난 6월에 이 마을을 처음 알았으니 벌써 6개월 만이다. 계단처럼 차곡차곡 쌓인 다랭이 논과 가파른 시멘트 길을 몇 구비 돌다보니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옅은 고산증으로 귀가 멍멍해 온다.

하늘아래 가장 높은 농평마을 다랭이논
하늘아래 가장 높은 농평마을 다랭이논김대호
오를수록 다랭이 논은 경사가 급해지고 또 예전처럼 ‘이 산꼭대기에 마을이 있기나 할까’ 의심이 들 즈음 갑자기 구릉은 사라지고 학 날개 품 같은 작은 들판이 펼쳐진다. 하늘이 처음 껴안는 마을 농평이다.

황토로 벽을 바른 기와집이 한 채가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씨 집이다. 겨우내 쓸 땔감이 수북이 쌓인 걸 보니 월동준비는 제대로 했나보다.

월동준비를 마친 인제씨 기와집
월동준비를 마친 인제씨 기와집김대호
새로 지은 흙집 별채 마당에 장작이 제법 쌓였다. 이씨가 굳이 나무를 패지 않아도 간간히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일삼아 알아서 패놓고 간다고 한다.


사찰을 짓던 목수 일을 그만두고 부인 서은경(36·여)와 고향에 돌아온 이씨는 석달 열흘 손수 흙벽을 쌓고 대패질을 해 기와로 지붕을 얹고 농월관(弄月館, 달을 희롱하는 집)이라는 멋들어진 이름도 지었다. 여기서 100년근 산삼보다 귀한 다현(7)이와 미현(5)이가 태어났다.

산골소녀 미현이가 맛나게 잣을 까먹고 있다.
산골소녀 미현이가 맛나게 잣을 까먹고 있다.김대호
산에 걸리는 해를 보기위해 아이들과 산에 올랐다. 30m 남짓 걸었을까 벌써부터 숨이 턱까지 차온다. 제비꽃대처럼 가녀린 발로 어쩌면 저리도 산을 잘 타는지….


"아저씨 빨리 와요."
아이들은 다람쥐 마냥 멈췄다가 다가서서 좀 쉬자고 할라치면 도망치기를 반복한다. 주저앉은 내 주위를 돌며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놀린다.

먼저 올라가 까치밥을 노리던 5살 미현에게 언니 다현이는 "새 먹으라고 아빠가 놔뒀어야"라고 제법 철든 말을 한다. 미현이는 슬그머니 돌팔매질을 멈춘다.

그러나 배가 고팠던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잣 열매를 한 움큼 주워와 망치로 ‘쿵쿵’ 때려댄다. 내가 할 땐 여간해서 까지지 않던 것이 다섯 살배기 꼬마 손에서는 알맹이 하나 다치지 않고 제 살을 '쏙' 하니 내민다.

나주에서 지리산까지 시집 온 아내 서씨는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려면 하루 3시간 넘도록 운전대를 잡아야 하지만 이 첩첩산중을 떠날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애들 아빠가 지리산주식회사(?) 사장이지만 전답 팔아 도시 가면 막노동판 외에 갈 곳이 있겠어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신용카드 없이도 잘 살 수 있고, 애들도 인터넷은 없어도 산에 사는 풀과 나무, 새와 야생동물들과 어울려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인제씨의 농월관 뒤뜰에는 산삼은 없어도 가시오가피, 산작약, 골담초, 엄나무, 찰밥나무, 소태나무, 쇠뿔딱부리, 영지, 한갈쿠(엉겅퀴), 딱주 등등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약초들이 진을 치고 있다.

얼마 전 이씨는 사람 머리통만한 상황버섯을 캤다. 소문을 전해들은 약제상들이 많은 액수를 제시하며 달려들었지만 팔지 않았다.

부산에서 요양온다는 말기 암 환자에게 써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지리산으로 오기 3일전,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래도 이씨는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줄 요량으로 상인들에게 팔지는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흙집 온돌방 문틈으로 뜨는 해
흙집 온돌방 문틈으로 뜨는 해김대호
밤이 되자 인제씨가 약초주를 들고 나온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지만 나도 오늘은 가시오가피주를 석잔이나 마셨다. 기분 좋게 몸이 풀리고 졸음이 몰려온다.

장작불에 엉덩이가 데일만큼 ‘설설’ 끓는 온돌방에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춘정(春情) 같은 가슴 뿌듯한 꿈까지 꾸며 한숨 늘어지게 잘 잤다.

약초를 캐러 가는 길에 가끔 황소만한 멧돼지와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길을 비킨다.

거기다 도회지 인근 야산에는 자취를 감춘 노루, 토끼, 오소리, 너구리, 삵쾡이, 족제비, 담비, 청솔모 같은 야생동물들도 흔한 동물이다. 그래도 이씨는 족제비만은 사양하고 싶단다.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일 없고 물이 차니 농약한번 안 뿌려도 풍년이다. 굳이 환경농법이 필요 없다. 내년부터는 오리를 풀어 놓을 생각인데, 너구리란 놈은 자기가 먹을 것만 물고 가는데 족제비는 심술이 많아서 죽여 놓고 가서 걱정이다.”

농평은 산 밑 동네보다 해가 한 시간 빨리 뜨고 늦게 진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이 없다. 요즘 인제씨는 새벽부터 일어나 뒷산에 오른다. 새로운 농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처음 시도하는 곰취나물 재배
지리산에서 처음 시도하는 곰취나물 재배김대호
이씨는 우리 쌈 '거리'로 식탁을 채운다는 각오로 지리산에서는 처음으로 야생 곰취를 채취해 재배를 하고 있다. 성공을 거둔다면 야생녹차에 이어 피아골 최고의 소득원이 될 전망이라고 그는 자신했다.

농평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마을이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투기꾼들이 하나둘 밀려들고 있다.

벌써 상당수의 땅이 팔려 나갔고 별장을 지은 사람도 있다. 육중한 중장비 소리에 새들이 화들짝 놀라 날아오르기도 한다.

인간의 욕심은 바다 밑 심해에서 산꼭대기까지 끝이 없나보다. '까치밥'에서 알 수 있는 이씨 가족의 아름다운 평화가 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온돌방은 장작으로 데운다.
온돌방은 장작으로 데운다.김대호


고려부활의 꿈 금환낙지(金還樂地) 농평
소금 한가마면 평생이 즐거운 땅

▲ 해발 803m 농평마을

인제씨는 요즘 작은 음모를 계획하고 있다. 벌써 돌 절구통까지 구했다. 절구통에 소금을 채우고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한줌씩 쥐어가 화산봉에 놓을 절구통에 뿌리게 할 생각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작은 마을을 지리산에 단 3곳 있다는 천하명당이라고 믿고 있다. 지관들은 금거북이 묻혀 있다는 금구몰니(金龜沒泥)를 으뜸으로 치고 천상의 선녀가 지리산 형제봉에서 승천하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렸다는 금환낙지(金環落地), 5가지 보물이 있다는 오보교취(五寶交聚)를 그 다음으로 친다.

그런데 엉뚱한 한자를 집어넣은 금환낙지(金還樂地)가 농평마을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농평은 ‘소금 한가마니 짊어지고 돌아오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땅’이라고 한 말을 전했다는 것.

고려제국이 망하자 조선왕조를 따를 수 없었던 이들이 소금 한 가마 짊어지고 들어와 평생 세상과 연을 끊고 살았을 수도 있다.

농평(農平)이라는 지명을 보면 신천지의 꿈이 관군에 무참하게 진압 당하자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자신들만의 해방구를 만들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도 약초를 캐다보면 그 시절 기왓장들과 자기 파편들이 나온다. 옛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소금에 얽힌 이야기는 또 있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출가해 성불했다는 하동 칠불사와 마주하고 있는 농평마을 황장봉(900m)이 워낙에 화산봉(火山峯)인지라 지리산에 매년 화재가 발생해 피해가 많았다.

그래서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스님들이 매년 정월초하루면 몰래 소금 한 가마니를 지고 와 파묻었는데 그때부터 화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제씨의 소금뿌리기 의식은 지리산에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칠불사 스님들의 덕행과 함께하고 옛사람들이 더러운 것에 소금을 뿌렸듯이 가정에 닥칠 화를 미리 막는 의식인 셈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이 작은 농평에서 꿈꾸었듯이 후세를 위한 금환낙지(金環落地)가 아닌 현세를 위한 금환낙지(金還樂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기도 하다. / 김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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