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데 명품이 왜 필요합니까

꿈꾸는 지렁이 에코페미니스트 이윤숙씨

등록 2003.12.05 11:28수정 2003.12.0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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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에게 에코페미니즘은 낯설고 막연한 단어이다. 에코페미니즘을 생태여성주의 혹은 생명여성주의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에코페미니즘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다. 그 정의도 조금씩 다르다.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처음으로 '에코페미니즘'을 주제로 논문을 쓴 남전우경은 에코페미니즘을 "여성인 나를 포함한 뭇 존재들을 생명으로 공경하는 사유와 태도"라고 정의한다. 또 서강대학교 정유성 교수는 "생명의 가치, 자연생태계라는 넓디 넓은 삶의 가치, 고른 사람의 삶을 살리는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라고 설명한다(동아일보 97년 6월 19일자 참조).

에코페미니즘 사이트 'ecofem.org'는 "젠더와 인종, 계급과 자연에 대한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이라는 다소 폭넓은 정의를 내리고 있기도 하다. 이윤숙씨가 생각하는 에코페미니즘은 좀 더 간단하다.

"자기 존재의 개화(開花)죠. 자기가 자기다움을 한껏 드러내는 것, 그것이 에코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a 꿈지모 친구들과 함께(맨 왼쪽이 이윤숙씨)

꿈지모 친구들과 함께(맨 왼쪽이 이윤숙씨) ⓒ 이윤숙

생명과 고통에 대한 여성의 감수성

자신을 '아나키즘적 에코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이윤숙씨는 "자연스럽게 에코페미니즘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원래 환경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이씨는 90년대 초 반핵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아나키즘과 에코페미니즘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다.

"핵문제는 현대 산업 문명의 위기가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봐요. 국가 엘리트에 의해 운용되는 핵기술은 국민들을 철저히 배제시키고 있죠.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국가가 핵개발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어요. 국가가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어요. 이건 '사회 운동'의 문제가 아니구나, 가치관의 문제구나."


그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생태 사상을 공부했지만 생태 사상도 여성인 자신과 연결되는 본질적인 부분들까지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이씨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준 것이 바로 에코페미니즘이었다. '자연과 여성',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대상화되어 온 두 대상을 통해 세상의 폭력과 억압을 드러내는 담론과 실천은 그에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에코페미니즘은 자기 존재의 만개(滿開)를 위해, 그것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등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특히 '아이를 낳는 몸' '완력이 발달하지 않은 몸'인 여성의 몸은 여성을 약자로 인식하게 하는 데 적잖이 기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씨는 여성들이 생명과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같은 여성의 감수성이 오늘날의 환경 위기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당신들의 판타지

그런 이씨에게 환경 운동 곳곳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제적 사고방식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는 실제로 몇달 전 한 신문에 실린 '만금이년 젖먹자'는 시를 비판한 글을 <여성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그 글에서 "남자들을 위해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놓는 '돌아가고 싶은 품 속'의 어머니와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그 '구원의 여성상'을 희구하고 미화하면서도, 한편으로 룸살롱에 가서 이 년과 저 년의 젖가슴을 맘대로 주무르고자 하는 남성들의 착취적 판타지"가 자연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른바 생태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시각도 다르지 않구나 싶어서 당황스러웠어요. '전기 톱날에 겁탈당하는 원시림' '미군에게 능욕당한 순결한 누이'… 강간의 메타포는 이제 지겨울 때도 되지 않았나요. 정말 새만금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만금이년'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았어야죠. 자연을 언제든 지분거릴 수 있는 대상으로밖에 못본다는 거에요."

이씨는 그것은 '당신들의 판타지'일 뿐이라고 못박았다.

꿈꾸는 지렁이들이 모였다

a 꿈지모의 세미나 모습

꿈지모의 세미나 모습 ⓒ 이윤숙

9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이씨는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자 했고 그 와중에 만난 이가 당시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환경과 여성'을 강의하던 문순홍(현재 바람과물연구소 소장) 박사였다.

"에코페미니즘을 고민하던 몇몇과 문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 학생들이 모이게 되었어요. 우리는 환경 문제가 곧 삶의 문제이자 여성의 현실이라는 데 공감했어요. 환경 문제에서도 여성들의 시각은 배제되어 있었어요. 환경 위기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해서 에코페미니스트 공동체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꿈지모)'가 만들어졌다. 인정받든 못하든 묵묵히 흙을 기름지게 하는 지렁이가 생명을 길러왔으면서도 늘 차별의 대상이 되어왔던 여성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지렁이'로 규정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지향이기도 하다.

'꿈지모'는 단순히 여성의 관점에서 생태 위기를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성의 눈으로 보는 대안의 경제·정치·문화를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돌봄의 문화를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꿈지모의 바램이다.

"자연이 자기 세계를 드러낼 때 외부 세계와의 투쟁은 필연적이죠. 그러나 그것이 곧 외부 세계의 말살, 정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씨는 인디언들의 예를 든다. 인디언들은 동물을 잡아먹으면서 그 동물이 자신의 존재가 되어 주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한다. 그러한 마음은 한꺼번에 많은 짐승을 사냥하지 않고 새끼를 밴 어미들은 잡지않는 행위들로 나타난다.

"행복해지는 데 왜 명품이 필요합니까?"

a 묵묵히 흙을 일구는 지렁이들처럼...

묵묵히 흙을 일구는 지렁이들처럼... ⓒ 이윤숙

그러나 실제로는 공생의 원리가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현실은 "내가 살려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더 가깝다. 이씨는 "절망적이고 끔찍하다"고 말한다.

"얼마전 여자를 때려 카드를 빼앗은 남자가 잡혔어요. 엘리베이터 CCTV에 찍힌 장면을 보여줬는데 정말 충격적이더군요. 멀쩡한 젊은 사람이 카드 하나 뺏으려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무지막지하게 패는 걸 보면서 물신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금 깨달았죠."

이씨는 현대 사회를 멍들게 하는 주범으로 '물신주의'를 꼽았다.

"돈이 없으면, 예쁘지 않으면, 학벌이 좋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사회잖아요. 대접받고 싶으니까 폭력을 행사하고 성형 수술을 하고 탐욕을 부리고…. 보세요, 전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이고들 있잖아요."

그는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풍요로움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허구적인가를 거듭 강조했다.

"쌀과 휴대폰을 맞바꾸는 사회가 얼마나 지속 가능하겠습니까? 행복해지는데 왜 신식 휴대폰이 필요하고 명품이 있어야 합니까? 사람들이 소비에 대해, 그 폭력성에 대해 너무 둔감한 것 같아요."

마리아 리즈를 존경한다는 이씨는 요즘 전통적 가치관 속에 내재된 생태적 지혜들을 어떻게 살려낼까 궁리를 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어요. 옛날 마녀들과 여신들을 부활시켜냄으로써 분절되어 있는 생태적 문화를 끌어내보고자 하는 거죠."

쉽지 않은 작업일 테지만 이씨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이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일뿐'이라고, 그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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