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현금지급기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뉴스게릴라가 만난 뉴스게릴라①] '권중희씨 미국보내기' 박도씨

등록 2003.12.08 15:14수정 2003.12.1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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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오후 6시23분, 오마이뉴스에 3만번째 뉴스게릴라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를 자축하며 <뉴스게릴라 3만돌파 기념 이벤트>를 다양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이벤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뉴스게릴라, 뉴스게릴라를 만나다' 의 첫번째 기사입니다....편집자 주)


a 독립자금 1천만원이 모금된 날, 그는 만세를 부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독립자금 1천만원이 모금된 날, 그는 만세를 부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 윤근혁

12월 3일 오후 6시 40분 '조흥은행 이대후문 지점' 현금지급기 앞. 모자를 눌러쓴 한 사람이 두리번거림도 없이 빠른 동작으로 통장을 기계 속에 넣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통장을 긁는 기계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종이를 서너 장 정도 넘기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비로소 통장이 튀어나왔다. 통장을 손에 쥔 사람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올랐다.

"야! 이렇게 될 줄이야. 정말 고맙습니다. 이 돈이 바로 독립자금이야 독립자금."

이 사람은 갑자기 기자를 껴안았다. 주름진 눈가 사이에 있는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새 눈물이 고였다. 통장엔 '10,066,025원'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 때에 서민들이 한푼 두 푼 천만 원씩이나 모아주시다니……. 권중희 선생님 미국 보내드리는 일 이제 다 됐다. 됐어."

현금지급기 앞에 선 한 사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박도 선생(서울 이대부고 교사·59). 회갑을 앞둔 그가 신판 '독립자금 모집책'을 자처하고 나섰다.

<오마이뉴스>에 "내 평생 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란 제목으로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이란 기사가 처음 실린 것은 지난 10월 27일. 이후 권 선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모금 운동을 제안한 11월 27일치 '취재후기'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기사가 이어졌다. 이 인터뷰가 전한 권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돈이 마련되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비밀문서를 죄다 열람해 보고 싶다. 그러면 백범 선생의 암살에 관한 얘기가 어딘가에서 나올 것이다. 그게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모금운동을 제안한 박도 선생은 이날부터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날마다 점심시간에 한 번, 퇴근 후에 한 번 은행을 찾았다.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은행까지는 걸어서 20분. 은행을 들락날락한 지 6일만에 독립자금이 1천만원을 돌파한 것이다. (12월 8일 현재 2500만원입니다-편집자주)

박 선생이 들고 있는 조흥은행 통장엔 5일 현재 400여 명의 이름과 송금액이 적혀 있다. 100만원이란 큰 돈도 있지만 대부분 1만원, 3만원과 같은 '적은' 돈이다. 하지만 박 선생은 사과박스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검은돈 몇 십, 몇 백억 원 보다 이 1만원이 더 값어치가 크다고 말한다.

"저에겐 '드르륵 드르륵' 하는 통장 긁는 소음이 음악과 같다. 민족정기를 살리겠다는 백성의 뜻을 느낀다. 한 사람의 많은 돈보다 여러 사람의 적은 돈이 더 값지다."

a 박도, 그가 학생들 앞에 섰다. 그는 고등학교 국어교사다.

박도, 그가 학생들 앞에 섰다. 그는 고등학교 국어교사다. ⓒ 윤근혁

박 선생은 통장 확인 작업 후,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처럼 '상부에 보고하는 절차'를 빼놓지 않는다. 바로 권중희 선생한테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권 선생은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요즘은 정말 민족의 염원을 느끼며 산다. 힘이 절로 난다"면서 말을 이었다.

"박도 선생님이 나한테 모금 상황을 하루에 한 번씩 알뜰히 알려주고 있다. 제가 곤궁한 형편이라 이 돈은 단 돈 10원, 100원이라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박 선생님께 통장을 맡겼다."

권 선생은 '박도'란 인물에 대한 칭찬을 계속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얘기였다.

"민족정기를 생각하는 의원모임 29명이 2001년 12월에 기자들 앞에서 나를 미국으로 보낼 것이란 발표를 했다. 그 때 기대를 크게 품었다. 하지만 여태껏 연락이 없다. 그런데 정치인도 아니고 돈도 많지 않은 일개 교사가 국회의원들도 못한 일을 해주고 있다. 정말 꿈만 같다."

관련
기사
- 박도 <의를 좇는 사람> 권중희씨 편 - "내 평생 소원은 백범 암살배후 밝히는 일"

국회의원 29명이 못한 일을 교사가 하다

한 고등학교 교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배후엔 이른바 '기자 권력'이 숨어 있다. 박 선생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된 때는 지난 해 8월 9일. 한 해를 갓 넘긴 새내기 기자인데도 벌써 250여편이 넘는 기사를 썼다.

연재기사만 해도 '항일유적답사기' '일본 겉핥기' '눈의 나라, 기타도호쿠' '의를 좇는 사람' '그리운 그사람' 등 5개에 이른다.

박 선생은 어릴 적 꿈이 '세 가지' 였다고 한다. 작가, 교사, 그리고 기자가 바로 그것.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음 군대생활 2년 빼고는 모두 학교에 있었으니 학교 경력만 50년 정도 된다. 교직생활을 32년 8개월을 했으니 교사의 꿈은 지겹도록 이룬 셈이다.

a 그는 내년 2월말 학교를 그만 둔다. '나무꾼 시민기자'가 되기 위해서다. 박도 선생이 3일 이대부고 교무실을 나서고 있다.

그는 내년 2월말 학교를 그만 둔다. '나무꾼 시민기자'가 되기 위해서다. 박도 선생이 3일 이대부고 교무실을 나서고 있다. ⓒ 윤근혁

여기다 박 선생은 작가다.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산문집 <비어있는 자리>, <샘물 같은 사람>,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항일 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와 같은 책을 써냈다.

이제 남은 꿈은 기자. 하지만 50세를 훌쩍 넘긴 터라 '자포자기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마이뉴스>를 만나 꿈을 이뤘다. 기자의 꿈을 이루면서 그는 누구도 하기 힘든 '독립자금 모집책'까지 겸하게 됐다.

"아들이 컴퓨터에 빠졌을 때 야단도 많이 쳤다. 그런데 요즘엔 아내가 '당신이 꼭 아들처럼 컴퓨터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시민기자 일이 내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일반 신문에선 데스크에 앉아 기사를 선별할 나이에 박 선생은 취재수첩을 들고 현장을 누빈다. 늦깎이 기자지만 각오 또한 남다르다.

"글재주가 부족하면 취재정신과 정성으로 때워야지. 하늘 쳐다보고 누워 있는 노인은 되지 않을 생각이다.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는 한 기사를 계속 쓰고 싶다."

늙은 나무의 최후 봉사를 꿈꾼다

박 선생은 교육청에 '내년 2월 말 명예퇴직'을 하겠노라고 신청서를 낸 상태다. 이미 강원도 횡성 산골 마을에 헌집을 봐 뒀다. 다행히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으니 이 곳에서 시민기자 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나무꾼 시민기자' 박도로 새 삶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요즘 '늙은 나무의 최후 봉사'를 꿈꾼다. 그의 꿈은 이런 것이다.

"나무는 늙어 쓰러져도 봉사를 한다. 쓰러진 나무를 따라 날짐승이 냇가를 건너고 길을 건넌다. 나도 이 나무처럼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글쓰기를 <오마이뉴스>에서 계속 해낼 참이다."

a 독립자금 통장. '권중희 선생 미국보내기'후원금 계좌번호. 조흥은행 579 - 04 - 410340 (예금주 : 권중희).

독립자금 통장. '권중희 선생 미국보내기'후원금 계좌번호. 조흥은행 579 - 04 - 410340 (예금주 : 권중희).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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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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