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모인 삶과 생명의 시

순천작가회의 '생명의 씨앗 詩展'

등록 2003.12.06 08:55수정 2003.12.0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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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순천시립도서관에서 시를 감상하는 시민들

순천시립도서관에서 시를 감상하는 시민들 ⓒ 안준철


시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시는 '메타포(은유)'지요.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시를 배우고 싶어하는 어부 출신 우체부 마리오에게 칠레의 세계적인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해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럼 은유가 무엇일까요? 다음 시 한 편을 감상해보시지요.

a 김해화 시인의 '흰 물봉선'

김해화 시인의 '흰 물봉선' ⓒ 안준철


시인은 철근 노동자입니다. 힘든 노동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산을 찾았겠지요. 그런데 '자주물봉선 핏빛으로 선연한 골짝'을 지나다가 시인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 살아온 삶이 바로 저 핏빛이 아니던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몸을 누일 집이 있어야 하겠고, 누군가 그 집을 지어야 하겠고, 집이 제대로 지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철근을 올려야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거늘, 그런 고귀한 노동을 천시하는 무지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시인의 답답하고 쓰린 마음을 핏빛을 품고 피어 있는 들꽃들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겠지요. 대신 말해주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은유이지요.

'나 지금 아프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러니 차라리 저 꽃을 봐라. 저 핏빛이 바로 내 핏빛이다.'

다행히도 시인에겐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반갑게 맞이해 주는 아내의 다정한 눈빛일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해가고 있는 황금만능, 경제 만능의 이 세상에 대하여 시인이 원망과 증오 대신 품고 있는 연민어린 사랑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지고지순한 사랑을 '핏빛 삶 가운데 눈부신 흰물봉선 한 포기'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겠지요. 그러니 시인은 산에서, 그 들꽃들 앞에서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언젠가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와 가장 가까운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때 제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삶'이라는 단어가 한 아이의 입에서 발음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시와 삶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a 이학영 시인의 '또 하나 불 꺼지고'

이학영 시인의 '또 하나 불 꺼지고' ⓒ 안준철


시인은 별을 보고 있습니다. '뒷동산 대나무 숲 위로/불 지핀 싸리비를 흔들어댄 것처럼' 총총하게 떠 있는 별들을. 아,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물론 시골에 살 때였습니다.

왜 싸리비에 불을 지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그 환한 불꽃들만큼이나 밝고 환하게 머리 위에 떠 있던 수많은 별들도 기억이 납니다. 낭만의 극치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시인은 하늘에 떠 있는 낭만적인 별을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시선이 '그 아래 소처럼 누워있는 마을'쪽으로 옮겨집니다. '눈 내릴 날을 기다리는 감나무처럼/굴 속 같은 동짓달 밤을 나고 있'는 마을로. 그리고는 한 술 더 떠서 '농약을 마시고 마당귀까지 나와 쓰러진/ 고샅 끝 광주댁을' 생각하고, 그이를 '묻고 온 날/ 홍시처럼 몇 점 켜지던 불빛들'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왜 보이지 않을까? 시인은 이 지점에서 시인이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할 상상력을 십분 발휘합니다. '아마 검은 강 어느 어귀까지/환하게 길 비춰주려고/바램하러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 대목이지요.

이때 검은 강이 표상하는 것은 물론 죽음이겠지요. 어쩌면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일 수도 있는 한 인간의 죽음을 사람도 아닌 마을의 불빛들이 모여 조문을 간 것으로 시인은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를 읽다보면 시적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만합니다.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떤 화려한 시어로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 아름다운 시가 나오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시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인 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의 깊이'를 지향하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순천 시립도서관에 오시면 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 한 장에도 생명의 시선을 곧추 세우는.

a 정안면 시인의 '낙엽 한 잎'

정안면 시인의 '낙엽 한 잎' ⓒ 안준철


아직 첫눈이 오지 않은 남도의 겨울, 무엇이 아쉬운지 돌아가지 않고 뒷걸음질치는 가을의 흔적과 함께 추운 겨울에도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시립도서관 뜨락에서 시와 사람이 같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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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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