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만 않으면 된다지만

등록 2003.12.06 23:57수정 2003.12.0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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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반경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맘때면 치러야 할 통과 의가 많았다. 원하지 않지만 꼭 참석해야 할 직업상의 모임도 많았다. 일부러 찾아 나서야 할 고마운 분들도 적지 않았다. 다소 번거롭고 먼길이라도 할 도리라고 부지런히 다녔던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한 해 동안 물심양면으로 보살핌을 주신 부모 형제, 따스했던 친구들, 정신의 은사님과 막 사귀게 된 새로운 지인들까지 일일이 챙기던 때가 있었다. 예쁜 엽서를 사서 꾸미고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우체국에 가서 붙이곤 했다.

관에서 주관하는 모임에 들러리까지 내 일로 받아들인 열정의 날들이 무색하게 올해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다. 게을러져서인가? 나이 탓인가?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이들의 생에 무관심해 진다는 것이 더 가까운 것 같다.

때로는 전화 한 통이 얼마나 끈끈한 정을 이어주는지 모른다. 쌀쌀한 날씨에 코 끝을 스치는 얇은 바람을 타고 한동안 멀어진 지인에게서 오는 소식은 살아있는 날의 기분 좋은 일렁거림이다. 두꺼운 외투 하나쯤 벗어도 좋을 따스함이 전해진다.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으니 한 해 마감 인사를 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낯설어졌지만 목소리로 느껴지는 정겨움으로 울컥이는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다. 어느 날 문득문득 소소한 일상에서 생각나는 아름다운 사람들….

한 때 절친했던 사람 사이가 시간이 지나고 공간이 바뀌니 상관없는 사람으로 멀어진 것 같은데 잊지 않고 먼저 찾아온 이에게 내 맘을 표현하고 싶었다.


무안하기도 미안하기도 해서 잊은 적 없다고 급하게 말하곤 한다.

잊었던 날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잊지 않고 살았다고 말하는 순간 가슴 안에는 커다란 도랑이 하나 생긴다. 도랑 속에는 내가 필요해서 찾곤 했던 과거가 웅크리고 있다. 밥 한끼 나누고 커피 한 잔으로 잔정을 도란거리던 추억은 차곡차곡 쌓여 할 말을 더해 주지만 한동안 연락 없이 살았던 무심함은 왠지 미안하기만 할뿐이다.


어떻게 잘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 갈 건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쉴 새 없이 그간의 결과들을 주르륵 보고하고 나니 들려오는 간단한 대답이 눈물을 일게 한다.

"소식 없어도 괜찮아 ,잊지만 않으면 돼."

그렇다.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가난한 날의 동지, 함께 한 날의 추억들, 서로에게 빌어 주는 소망들로 내 가슴은 더 따끈해 질 테니까.

"그래도 소식은 전할게요. 건강하세요."

자신에게 당부하는 말을 꾹꾹 눌러 표현하고 나니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잊지만 않으면 돼." 며칠동안 감동의 말이 되어 나를 따라다녔다. 올 한해가 가기 전에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곰곰이 꺼내 보아야겠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인간적인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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