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실종된 디스토피아, 마가티

필리핀 마닐라 3박 4일 여행기(8) 마가티 내의 한국대사관저

등록 2003.12.07 18:47수정 2003.12.07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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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속의 '알파빌라', 마가티

"여기는 천국이예요." 이 천국의 이름은 브라질의 상파울루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알파빌라이다. 넓이는 정확하게 축구경기장 44개 정도 되는 면적이다. 천국은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도 포착할 수 있는 탐조등과 전자감응장치를 설치한 수미터 높이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심지에서 부랑자들과 저항자들을 두려워 하는 대도시 주민들, 자기나라의 사회현실에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 유럽 또는 그보다 더 풍요로운 미국의 몇몇 지역에 살고 있는 보통의 가족들처럼 살고 싶어하는 주민들한테는 이 도시가 정말 이상적인 도피처이다.(중략)

모든 방문객들은 자신의 신원을 확인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방문하고자 하는 입주자의 대답을 듣고서야 들여보내진다, 대형차량들은 꼼꼼하게 조사 받는다. 경비원들은 항상 배달원이나 건축노동자들의 몸 전체를 더듬어본다. 그들이 뭔가 훔쳐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스 피터 마르틴, 하랄드 슈만 <세계화의 덫> 중에서)


필리핀의 부자동네 마가티에 있는 화려한 빌리지를 보며 갑자기 '세계화의 덫'에서 묘사됐던 브라질의 도시, '알파빌라'가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가티 내 빌리지의 높은 담장에는 정말로 총을 든 경비대가 문 앞에 서서 통행차량들과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감시받지 않고 이 문을 통과하는 자동차들은 모두 벤츠니, 볼보니 하는 고급 자동차의 행렬뿐이다.

굳이 브라질까지 가지 않아도 이곳 필리핀에서 책 속에 묘사한 알파빌라의 모형을 목격하게 되자 어제 보았던 그 기찻길 옆 판자촌이 생각나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두려움의 알 수 없는 정체는 책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알파 60'이란 컴퓨터가 조정하는 사랑이 실종된 디스토피아 도시를 묘사한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알파빌'에서의 기분 나쁜 공포감일 수도 있겠고, 컴퓨터로 조정되는 가상의 공간 매트릭스의 참혹한 실제 모습을 봤을 때의 그 지저분하고 충격적인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 마가티의 빌리지에서 사는 필리핀의 상류층은 여기가 천국이라고 느낄 것이다. 얼마 멀지 않은 기차길 옆 판자촌 기차지붕 위로 더러운 쓰레기가 날려도,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빈민가 톤도의 거리 위에 배설물이 튀더라도 이들은 그런 사실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여러 명의 하인을 둔 쾌적한 환경에서 타갈로그어가 아닌 영어로만 말하면서 미국의 비버리힐즈를 꿈꾸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필리핀이란 국가는 이미 별다른 의미가 없다. 오로지 그들은 마가티 내의 호화로운 빌리지 소속 주민일 뿐이다.

마치 그들이 가상현실인 매트릭스에 의해 에너지를 빼앗기는 참혹한 현실을 혼동하며 컴퓨터로 조정되는 가상현실의 즐거운 꿈을 꾸고 있는 인간들과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에게도 인류애, 동포애라는 사랑이란 단어가 존재할까?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망령은 복지라는 단어를 후퇴시키면서 급속히 중산층이 무너지고 잘사는 20%와 못사는 80%의 사회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다. 심하냐 덜하냐의 정도차이만 있을 뿐 세계제일의 강국이라는 미국도, 물론 우리나라도 이러한 추세에 무관하지 않다.

한 끼의 식사비용이 없어 목 메 자살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반면 백화점의 명품관에는 재고가 없을 정도로 수입명품들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물론 있지만 우리나라도 엄연히 알파빌라를 꿈꾸는 부자들만이 모인 그들만의 동네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60년대 부자 나라 필리핀의 제자리걸음

"60년대만 해도 이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부유했어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 라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부정축재, 그 부인인 이멜다의 사치와 허영심은 필리핀 경제를 20년이나 후퇴시켰고 그 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피플 파워'에 의해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대지주 출신이라는 출신성분의 한계와 자신의 재임시절 쿠데타를 막아준 라모스 국방장관에게 의존하다가 결국엔 정권마저 그에게 넘겨주는 등 군부와 지주세력에서 자유롭지 못해 경제에 무능한 면을 보여주었지요.

더구나 동서 냉전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끊어진 이후 필리핀의 경제는 더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는데 필리핀 내에서 80%를 차지하는 빈민층들의 열렬한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던 톤도 출신의 영화배우 에스트라다는 기득권층으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도덕성 문제와 부정부패혐의로 구설수에 오르다가 결국 쫓겨나 또다시 지주 출신의 현 대통령 아로요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필리핀 극빈층이 나라의 부를 독차지하고 있는 엘리트 계층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고, 마르코스 독재정치에 대항하고 정권교체를 외치며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무섭게 몰려올 만큼 피플 파워가 강한 나라인데도 여전히 이멜다 마르코스 같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버젓이 활동하고 있고, 여전히 대지주 출신의 대통령들이 집권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필리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내일보다는 오늘을 중요시 여기는 순진한 필리피노들의 성향인지 아니면 골치아픈 일은 잊어버리는 필리피노 특유의 건망증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갑갑해져온다.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했던가, 우리 같았으면 당장 세인의 지탄을 받아 운신도 못할 이멜다가 대통령으로도 출마한다고도 하고 마닐라 시장으로도 출마한다며 나서는 상황을 용인해주고 있는 순진한 필리피노들에 대한 생각은 아예 도외시하고 정치는 정치대로 군부는 군부대로, 지주는 지주대로, 필리핀의 20%에 해당되는 이들이 제각각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려고 하지 그 누구도 자신의 조국 필리핀이란 나라에 대한 사랑은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필리핀은 풍부한 자원과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고 있어도 기간산업의 육성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비스 산업만 기형적으로 발전하여 생산성이 없고,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해외의 그 어떤 기업도 쉽사리 투자를 하려고 하지 않다 보니 남들이 발전을 할 때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 잃어버린 에덴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주의가 꽃피고 있는 시절에, 부의 평등을 다들 주장한다는 이 시기에 여전히 마가티의 빌리지가 존재하는 반면 톤도와 같은 빈민가가 존재하는 우리 앞의 엄연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마가티 내의 웅장한 한국대사관저

a 마가티에 있는 넓은 규모의 한국 대사 관저, 육중한 기와담장이 웅장해보인다.

마가티에 있는 넓은 규모의 한국 대사 관저, 육중한 기와담장이 웅장해보인다. ⓒ 김정은

사랑을 잃어버린 이기심의 디스토피아 알파빌, 그 사랑이 값싼 동정이었든, 천민자본주의의 소산이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듯이 대다수 필리핀 빈민층 사람들도 나처럼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마가티 빌리지 속의 그들이 과연 알고 있을까?

장 뤽 고다르가 영화 속에서 예언했던 사랑이 실종된 디스토피아 알파빌이 바로 이 마가티가 아닐까? 그러나 불안한 것은 이 마가티의 빌리지 같은 형태가 점점 늘어날 것이고 우리 나라 또한 그 추세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착잡한 생각을 하며 마가티를 자동차로 돌다보니 기와로 담장을 쌓은 육중한 한국대사 관저가 보인다. 한국대사관 사무실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고급스런 이미지이다. 사무실보다 좋은 대사관저라…. 부자동네에 대사관저가 있으니 우리나라가 잘사는 나라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대사관 사무실이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문득 머리를 돌려 우리나라를 보니 남의 일 같지 않다. 과연 우리의 정치가, 우리의 경제가 필리핀과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합리적인 해법은 없는 것 같다. 해법이란 서로 초심으로 돌아가서 스스로의 이기심을 버리고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보기에 진정한 대안은 각종 세계화 및 유연화 전략에 참여와 협력을 함으로써 자본의 위기관리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진 주체와 객체를 바로 세우고 수단과 목표를 분명히 하고 기업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관계를 올바로 세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있을 것이다."

(한스 피터 마르틴, 하랄드 슈만 <세계화의 덫>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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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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