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살리는 의사가 바로 농부입니다"

참농부 정선섭 선생을 찾아서

등록 2003.12.10 13:15수정 2003.12.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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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살리는 의사가 바로 농부입니다."


정선섭 선생의 이름 풀이는 기가 막히다. 베풀 선에 불꽃 섭. '불꽃을 베풀라' 선생은 이름에 걸맞게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겸손의 말씀을 하지만 선생은 이미 남들에게 좀 더 수월하게,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도맡아 했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박사급 농부, 항상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아이디어를 찾는 이 사람,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삶이 후회없다는 충청도 아산의 참농부 정선섭 선생을 만났다.

a 정선섭 선생이 트랙터 앞에서 웃고 있다.

정선섭 선생이 트랙터 앞에서 웃고 있다.

"땅을 살리려 노력하는 우리 농민은 땅도 살리는 의사요, 사람도 살리는 의사입니다. 우리가 땅을 맑게 하여 맑은 물과 공기가 모여 여러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땅과, 물, 공기를 살리는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지켜야 할 숙제입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깨끗한 땅을 우리가 부끄러움 없이 후손에게 물려주고 깨끗한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30년 넘게 환경 농업을 해 온 정선섭(56) 선생의 첫마디는 예의 땅을 지키고 살아온 사람의 전형답게 '땅사랑'이다. 땅과 사람을 살리는 흙의사 노릇 30년이니 주위에서 자신을 부른다는 박사, 과학자 소리가 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선생은 무엇이든 스스로 만들어 쓴다. 좀 더 편리하게 쓰기 위해 실험하고 고쳐쓰고 새로운 도전을 마다 하지 않는 그의 실험 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선생은 26살에 결혼하면서 줄곧 땅을 지키고 땅을 갈며 변함없는 청정한 모습으로 농부의 길을 걸어왔다. 내 나라에 맞게 기계들을 고쳐가면서 만드는 걸 워낙 좋아해서 뚝딱거린다는 선생은 애초 좌절이나 중도포기란 사전에 없다. 그래서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한 걸 아쉬워하면서 계속 공부하고 연구한다.

매일 선생이 써 놓은 영농일기와 하루 일을 반성하면서 적은 일기장이 66년부터 쓰기 시작해 수십 권이다. 일기책을 가리키며 도전과 좌절의 역사라고 선생은 말한다. 그곳에는 오랜 시간 동안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역사가 숨을 쉰다.


"아들이 언젠가 농촌으로 돌아오면 여러 농사의 시행착오를 아들에게는 겪지 않게 하려고 일기를 매일 씁니다. 아들을 위한 자료인 셈이지요. 대들어 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하겠지요."

선생은 논 1만 평에 반무경운 쌀겨농법으로 유기 재배를 하고 있다. 작년에 흙살림에서 유기재배 인증을 받았다. 자급용 채마전 800평에는 고추, 감자, 마늘, 땅콩, 메주콩, 참깨, 참외, 옥수수, 열무, 시금치들을 심는다.


261명 아산 한살림 생산자의 일원이며 믿고 소비 생산하는 신뢰관계가 중요하므로 반복 교육을 자주 한다. 지역 순환시스템으로 유기축산도 곧 가능할 것이라고 전한다.

자수성가한 선생의 선대는 천수답 소작으로 밥 문제 해결이 어려웠다. 형편상 5남매의 맏이였던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생들을 들쳐업고 돌보며 농사일을 도왔다.

군대를 다녀오고 농사짓다가 결혼한 후 74년경 학원지에 소개된 일본 효소농법으로 농사짓는 담양의 정기영씨를 찾아갔다. 그때 농약이 나쁘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걸 계기로 선생은 그때부터 농약은 절대 쓰지 않았다.

한때 선생은 목장도 했다. 1마리로 시작하여 1말짜리 우유통을 배달하면서 30마리까지 늘어난 적도 있다. 대신 17년간 바깥에 나가 잔 적이 한번도 없었다. 냄새 때문에 동네에서 민원이 생겨 그만둘 때까지 목장을 하여 경운기도 사고 트랙터도 사고 효자 노릇을 했다.

한때는 논농사 규모가 2만 평이 넘기도 했다. 그땐 사람을 사서 풀을 뽑았다. 사실 사람 손으로 논을 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여러 차례 사람을 사서 몇백 명을 들여도 피가 빽빽했다. 돈은 되지 않고 바쁘기만 했다. 그러나 땅도 죽이고 결국 사람도 죽이는 농약을 쓸 수는 없었다. 돈을 생각했다면 농약을 썼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91년 가톨릭농민회(가농)의 도움으로 일본을 견학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이가모 오리농법을 알게 되었다. 돌아와 수소문 끝에 전의에서 청둥오리를 구해 1만5000평 논에 1600마리 오리를 넣고 오리농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던 때라 어디 농법을 배울 때도 없었다. 너구리 피해도 막심했고 오리들도 까닭없이 죽어갔다.

가농에서 출자금을 받아 성남 오정동에 매장을 내기도 했는데 농사 짓는 사람이 장사를 하려니 정서가 안 맞았다. 마음고생만 잔뜩하고 출자금이 다 날아갔다. 그때 서울로 최루탄 맞으러 많이도 다녔다.

유통이 제일 어려웠는데 우연히 한살림 박재일 회장을 소개한 책을 보고 박 회장에게 연락을 했더니 곧바로 박 회장이 내려와 만나면서 한살림과 인연이 되었다. 지금은 전량 한살림에서 수매한다. 선생은 지금 한살림 수도작분과 대표를 맡아 교육도 많이 다닌다.

젊은 후배 농민들에게도 한마디한다.

"돈에 집착하면 양심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농부의 양심을 팔아선 안됩니다. 조상에게 물려 받은 것을 오염시켰으니 후손에게 깨끗하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옛날 것 그대로인 유기농을 해야 됩니다. 이제 우리가 배를 띄웠으니 노만 열심히 저어 오면 됩니다."

이제 한살림 생산도 계획 생산이 되어야 한다고 힘을 실어 주장한다. 5월 안에 생산계획을 세워 내년 작목을 선택하고 선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일이 겁이 나는 것을 보니 "청춘이 다 간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선생의 연수입을 묻자 빼곡히 적힌 노트를 펼쳐 대번에 계산해 3582만원이라고 답한다. 빚은 다 갚고 3년 전부터 저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발바닥 큰 사람이 빚이 많지 비비지 못하는 사람은 빚도 없다고 활짝 웃는다.

농사만 지어 1남2녀 아이들 다 교육시키고 트랙터 등 기계 사고 이만 하면 적자는 아니라고 미소짓는다. 동네에서는 선생 부부를 '올빼미'라고 놀린다. 5시 아침 기도로 시작하여 밤에는 컴퓨터에서 농업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쉼없이 일하고 작년까지 동네 이장일을 보면서 말보다 행동으로 믿음을 준 애칭이리라.

예전엔 보리를 심어 보리차 수요가 많아 보리수매도 해갔는데 요즘은 도회지 사람들이 생수를 먹는 탓에 보리를 해외에서 비싼 달러주고 수입해 온다. 밀도 마찬가지. 밀 가격을 맞춰 주면 밀을 심어 쌀 수확이 떨어져도 밀에서 상쇄할 수 있으니 정부 차원에서 특용작물을 심으라고 하기 전에 밀, 보리를 수매해 주는 인식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한 농민들이 쉽게 농산물을 가공할 수 있도록 법을 완화하는 것이 시급하단다.

선생은 가급적이면 스스로 자재를 만들어 쓴다. 한방 효소를 비롯해 흙 치는 것에서부터 쌀겨 뿌리는 기계, 호이스트 승강기 등 선생의 농자재 창고에는 만물박사의 결과물이 수북하다. 혼자 여물을 써는 작두는 특허 직전까지 갔는데 특허 절차가 복잡해 포기했다. 다른 곳에서 보완해 만들어 전국에서 인기리에 팔렸다고.

쌀겨 살포기도 어떤 회사에서 와서 선생의 아낌없는 기술 전수로 기계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고 한다. 농민들이 보다 쉽게 농사 지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사심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아이디어 제공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불꽃처럼 아낌없이 베푸는 농부, 생명 다하는 날까지 땅을 지키며 끊임없이 실험하고 뭔가를 만들어낼 참농부, 그의 이름을 여기 적는다. 정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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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 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품을 넓혀 넓게 드리워진 그늘로 세상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낌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무의 철학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또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 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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