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꼭대기에 <오마이뉴스>가

[2003년 나만의 특종]<느릿느릿이야기>는 큰 나무로 자랄 것이다

등록 2003.12.12 09:51수정 2003.12.1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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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느릿느릿이야기> 제2집. 84쪽. 느릿느릿이야기 발행
오프라인 <느릿느릿이야기> 제2집. 84쪽. 느릿느릿이야기 발행느릿느릿 박철
나는 평소 수명이 다된 형광등처럼 껌벅거리길 잘 하는 건망증의 달인(?)이다. 건망증이 심하면 정리정돈이라도 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올해 우연한 기회에 무엇인가 내 자신의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여기저기 잡지나 신문에 상당한 양의 글을 써왔다. 그런데 그것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컴퓨터에 지난 2-3년 저장해 놓은 원고도 하드디스크 고장으로 공중분해가 되고 말았다.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홀가분해서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허전한 것이 적자 인생 같은 느낌이 찾아들었다. 그래서 궁리를 한 것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거기에 다 글을 정리해 놓으면 도둑맞을 일도, 공중분해 될 일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느릿느릿이야기> 홈페이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두어 달 동안 워밍업을 하다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는이야기>의 특징은 삶의 주변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다. 결코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글을 올렸다. 처음 6개월은 매일 한 꼭지씩 글을 올렸다. 그동안 주로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은 유년시절 이야기, 교동이야기, 가족이야기, 자연을 통해 경험한 단상들이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느릿느릿이야기> 홈에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초부터 박철의 <느릿느릿이야기>라는 제목으로 191회 글과 사진을 올렸다. 그동안 단 한 차례 생나무 미역국을 먹었다. 괜찮은 성적이다. 그런데 솔직한 고백이지만, 단 한차례 생나무 미역국을 마셨던 글은 내 딴에는 깊이 생각하고 쓴 글이어서 지금도 애착이 가는 글이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처음으로 “여보, 책상위에 뱀 나타났어.”라는 제목의 글이 메인톱에 올랐는데, 조회수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3만7천만회가 넘게 조회되었다. 자동으로 많은 댓글이 올라왔다. 별의 별 내용이 다 있었다. 재미있다거나 격려성의 댓글도 있었지만 비난에 가까운 저급한 내용의 댓글도 있었다.

또 한번은 “그대의 마음에 바다가 있는가?”라는 글이 톱으로 올랐는데 어떻게 동해에서 일몰 구경을 할 수 있겠냐는 거친 항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강력하게 나오니, 30년 전 내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싶어 동해안 현지 공무원을 통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 한 적도 있었다. 동해안에서도 여름철 날씨만 좋으면 근사한 노을을 볼 수 있노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 상식을 기초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꼭 절대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느릿느릿 제1회 가족모임. 2003.10.3. 교동 지석회에서
느릿느릿 제1회 가족모임. 2003.10.3. 교동 지석회에서느릿느릿 박철

<오마이뉴스><사는 이야기>에 글을 올리면서 가장 큰 수확은 사람을 대하든지, 자연을 대하든지 좀 더 깊이 있는 사유(思惟)와 관찰을 하게 된 점이다. 내면의 깊은 성찰을 동반하지 않고는 어떤 형태의 글이든 붓장난으로 끝날 위험이 있다. 나는 그 점을 늘 조심하고 있다. 가급적 담백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지인들 가운데는 나의 이런 행적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러나 크게 괘념치 않는다. 적어도 내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인기와 호사에 영합하는 속물은 아니라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한 꼭지의 글을 쓰기 위해 더 많은 묵상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한다. 내가 쓴 글이 번듯하고 격조 높은 글이 아니어도 만족한다. 저자거리의 값싼 물건처럼 취급되어도 좋다. 그러나 나름대로 나의 글은 적지 않은 산고(産苦)의 과정을 거쳤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부끄러워 할 일이 무엔가.


어사지간 교동섬에 들어와 산지 만 7년이 되었다. 시골에서 5년 정도 살다보면 사람들의 특성이 다 드러난다. 누구네 집에 숟갈이 몇 개 있는 것 까지 다 알게 된다. 사람을 만나도 건성으로 만나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신비감도 사라진다. 매사에 진지함은 떨어지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된다. 그러다보면 편안한 일상에 쉬이 빠져들게 되고 자기 발전은 멈추고 만다.

느릿느릿 가족들이 교동 들놀이패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느릿느릿 가족들이 교동 들놀이패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느릿느릿 박철

사물에 대하여 깊은 생각과 관찰을 하다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 느낌이 강렬하게 찾아올 때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삼각프리즘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 황홀한 일곱 가지 무지개 색을 볼 수 있었듯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자연에서 전과는 확연히 다른 좀 더 심화되고 밀착된 느낌을 받는다. 사람과 자연과의 일체감이 아닌가. 그것이 가장 소중한 열매이다.

그동안 <오마이뉴스>는 나의 경직되고 방만한 삶을 반듯하게 정리해주고, 인생을 새롭고 조망(眺望)해주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사는이야기>를 통해 함께 마음과 뜻을 나눌 수 있는 벗들을 만나게 된 것도 내게 있어서 행운이고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국내 뿐 만아니라 외국에서도 <느릿느릿> 문을 두드린다. 참여하는 분들도 직업군도 다양하다. 현직교수, 교사, 변호사, 의사, 화가, 직장인, 자영업, 주부,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느릿느릿이야기> 가족모임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격월간으로 잡지도 발행하게 되었다. 이번 주에는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이야기를 엮어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박철 산문집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 나무생각. 270쪽. 9800원
박철 산문집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 나무생각. 270쪽. 9800원느릿느릿 박철
이심전심, <느릿느릿>의 소중한 마음과 뜻이 전해져, 느릿느릿 가족들 간에 깊은 친화(親和)와 신뢰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무엇보다 ‘느릿느릿’이라는 개념이 아직은 미미하지만 사회적 이슈로 주목받게 되었다.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오마이뉴스>가 엮어준 선물이요 열매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나의 삶의 꼭대기(Top)에는 <오마이뉴스>가 있었다. 나는 등산하는 심정으로 <오마이뉴스>를 올랐다. 나의 고민과 삶의 흔적이 <오마이뉴스>에 고스란히 배여 있다. 물론 산에 올랐으면 내려올 줄도 알아야 한다.

<느릿느릿이야기>라는 나무는 계속 자랄 것이다. 큰나무로 자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삶에 지친 사람들 누구라도 쉬었다가 갈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며, 목마른 사람에게는 한 바가지 맑은 샘물을 전해주고 싶다. 앞으로도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라는 창(窓을) 통해서 좀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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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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