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아이

내가 제자 앞에서 작아지는 이유

등록 2003.12.13 14:58수정 2003.12.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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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도 아니고 이름 때문에 수업 시간마다 저를 긴장하게 만드는 아이가 있습니다. 배병귀. 선생치고는 장난기가 보통이 넘는 저는 그를 병귀가 아닌 방귀라고 부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가 다행히도 그 한 순간의 고비를 잘 넘기고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곤 하는 것입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병귀는 아주 평범한 아이입니다. 얼굴빛도 거무데데하고 말수도 적은 편이어서 수업 시간마다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별로 향기롭지 못한 자신의 이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그가 저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학교 축제 공연 개막을 두어 시간 앞에 두고 연극 리허설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공연 연출을 맡은 관계로 영사실에 있었는데 열 개가 넘어 보이는 테이프를 두 손에 가득 들고 들어오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병귀였습니다. '어, 방귀가 여기 웬일이냐?' 또 제 입에서는 그런 농이 나올 뻔했는데, 그런 나와는 달리 그는 자못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날 무대에 올릴 연극은 일종의 뮤지컬이었는데 그는 음향 담당이었습니다. 영사실에서 무대까지 제법 먼 거리에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육성으로 오고 가는 대사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제때에 음악을 내보내야 하는 그로서는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는 한 대목에서 그만 실수를 하고 맙니다.

삽시간에 배우들의 액션이 뒤엉키고 연출자의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그는 거기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테이프를 다시 감아 원상태로 되돌리면서 실제 공연에서 실수를 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듯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 순간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손길이 있기에 무대에서 배우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연기에 몰입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습니다. 리허설이 끝나자 테이프를 챙기는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또 이것을 다 되감아야겠구나."


그런 일이 귀찮기도 하고 신경이 쓰일 거라는 생각에 위로의 말을 건넨 것인데 그는 대답 대신 맑고 조용한 미소를 흘릴 뿐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귀찮아하면 어떻게 연극을 하겠느냐는 듯이.

수업 시간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그가 갑자기 거인처럼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머리 속으로 이런 생각들이 스쳐가기도 했습니다.


열 달 가까이 교실에서 그를 만나고 있지만 나는 그에게 과연 무엇을 가르쳤을까? 만약 그에게 연극이라는 특별 활동의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다면 정규 수업만으로 그런 성숙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 사회 생활을 하면서 정작 필요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이나 희생 정신에 대해서는 오히려 한 편의 연극을 완성하면서 더 큰 배움의 기회를 갖지 않았을까?

머리에 주입되는 지식이 아닌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동아리 활동이나 노작 교육에서의 자기 역할을 통해서 한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가 가능할 터인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타율적인 의지로 지식을 주입하려고만 드는 우리 교육은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저는 수업 시간에 그의 이름을 부를 차례가 되면 긴장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특이한 이름 때문에 장난기가 발동해서가 아닙니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제자 앞에서 왠지 작아지는 어떤 숙연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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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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