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현장'에서 술잔을 들이켰다

[서른 즈음에 떠난 여행 16]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에 서서

등록 2003.12.15 11:45수정 2003.12.1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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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충북 영동군 노근리 현장.

충북 영동군 노근리 현장. ⓒ 박상규


어릴적 우리집은 청계산 깊은 곳에 있었다. 주말과 휴가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청계산으로 밀려들어왔고, 사람들은 우리집에서 식사와 술을 해결했다. 형형 색색의 등산복을 입고 찾아오는 '서울 손님'구경은 어린 내게 흥미와 재미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나는 좀체로 청계산을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날 일도 없었다. 그래서 등산객을 구경하는 건 다른 세계와 무언가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는 신선한 과정이기도 했다. 난 그 등산객들이 신기했고 좋았으며, 그들의 도회적인 삶을 경이롭게 바라봤다.


화창하던 하늘에서 갑작스런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날로 기억된다. 우리집에는 비를 피하기 위해 몰려든 등산객으로 꽉 들어찼고, 난 그런 등산객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그 때 수많은 등산객들 속에서 황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조각같이 잘 생긴 사람이 어린 내 시선을 붙잡았다. 내 두 눈으로 미국인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서울 사람도 경이롭게 구경했던 내게 그 '아름다운' 미국인은 환상 그 자체였다.

여름날이면 팬티 하나만 걸치고 살았던 나는 그날도 마찬가지였다.난 흰색 팬티 하나만 입은 채 흘러내리는 코를 훌쩍이며 입을 헤 벌리고는 마치 온몸이 굳은 것 마냥 우두커니 서서 오랫동안 꿈꾸듯 그 젊은 미국인을 쳐다보았다.

그 미국인도 한국형 꼬마 타잔 같은 나를, 엷은 미소를 띄우며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우린 그렇게 얼마 동안 서로를 흥미있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미국인은 내 손을 잡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혼잣말을 하며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게 입혀 주었다. 그리고는 처음 맛보는 과자를 내 입에 넣어 주면서, 맛있게 먹는 나를 온화한 미소로 바라봤다. 난 금방 아름다운 미국인에 매료되었다.


이렇듯 내가 처음 경험한 미국, 미국인은 경이롭고 환상적인 것이었다.

난 미국을 아름답게 생각했다. 북한은 모두 빨갱이들이고, 미국은 우리를 구해준 천사의 국가라고 아버지는 내게 이야기했고, 착한 아들이었던 난 그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한국전쟁으로 당신의 두 형님이 모두 장애인이 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지 아버지의 반공 교육은 철저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난 맥아더 장군을 은인으로 숭배했고, 김대중은 '빨갱이'가 확실하다고 믿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름대로 과학적 사고가 가능해진 시점부터 나는 아름다운 미국을 의심했고, 마음 속에 꿋꿋하게 서 있던 맥아더의 동상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20살을 넘기면서부터는 미국에 대한 의심은 분노로 바뀌었고, 김대중은 '빨갱이'가 확실하다는 믿음을 간직 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는 '과격'한 학생이 되었다.

a 노근리 학살의 현장.

노근리 학살의 현장. ⓒ 박상규


14일 영동 노근리 학살의 현장을 찾은 나를 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보셨을까. 미국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토록 귀여워했던 당신의 막내아들이, 이 차가운 겨울날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사들고 노근리를 찾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난 11월 3일 광주 망월동 참배로 이번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동안 공동체 마을에서 지낸 후 다시 길을 떠나는 오늘. 난 학살의 현장 노근리를 가장 먼저 찾았다. 200명이 넘는 생목숨이 미군의 기총 소사에 무참히 쓰러진 그 학살의 현장에서 다시 신발끈을 동여맸다.

날은 차가웠다. 처음엔 맨손으로 노근리 쌍굴다리에 갔다. 수백 명의 목숨이 쓰러진 현장에 오면서 술 한 병 사들고 오지 않은 게 어색했다. 먼길을 다시 달려가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사왔다.

a 철조망 안쪽 흰 페인트는 아직도 남아있는 총탄자국을 표시하고 있다.

철조망 안쪽 흰 페인트는 아직도 남아있는 총탄자국을 표시하고 있다. ⓒ 박상규


아직도 총탄의 흔적이 수없이 남아있는 노근리 학살의 현장에 소주 한 잔을 따라서 엄숙하게 올렸다. 이젠 라이터 켜는 것도 어색해 졌지만, 끊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 학살의 땅바닥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도 빈속에 쓰디쓴 소주 한 모금을 마셨다. 어린 내게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외투를 벗어 주었던 아름다운 미국 청년이 떠올랐다. 미국은 언제나 올바르고 우리의 은인이라고 가르쳤던 아버지도 떠올랐다.

맥아더 장군을 생각하며, '빨갱이'로부터 우리를 구해줬다는 미군을 생각하며, 동두천 의정부 기지촌의 양공주를 생각하며, 안주도 없이 찬바람 맞으며 노근리 학살의 현장 위에 우두커니 서서 독한 소주를 다시 들이켰다.

매향리를 생각하며, 호기 좋게 'axis of evil'을 외치던 부시와 그에 환호하며 기립 박수를 치던 미국 의회의 엽기적인 모습을 떠올리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밤하늘에서 불꽃놀이 하듯 폭탄을 쏟아 붓던 미국을 생각하며, 팔 다리 잘려나간 이라크 아이의 젖은 눈을 떠올리며 쓰린 속에 다시 쓴 소주를 부었다.

미선이와 효순이를 떠올리며, 무죄 판결을 받고 떠나던 미군을 떠올리며, 죽은 사람은 있지만 책임자가 없는 그 기막힌 현실을 생각하며, 수십 수백만 촛불의 외침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당한 그 대단한 미국을 생각하며 벌컥벌컥 소주를 마셨다.

a 새마을호 열차는 그 이름답게 빠르고 무심하게 학살의 현장 위를 달린다.

새마을호 열차는 그 이름답게 빠르고 무심하게 학살의 현장 위를 달린다. ⓒ 박상규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한없이 나약하게 만드는 그 미국을 생각하며, 그 미국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우리 현실을 생각하며, 난 그렇게 무기력하게 술을 마셨다. 노근리 학살의 현장 위에서 분노의 술을 들이켰다.

술 취한 내 머리 위로 경부선 새마을호 열차가 무심하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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