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맥주를 마시자고 한 이유는 무얼까?

[캠핑카 타고 유럽여행 5] 브레멘에서의 단상들

등록 2003.12.17 06:09수정 2003.12.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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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독일에서 함부르크 다음으로 중요한 항구 도시 브레멘.

독일에서 함부르크 다음으로 중요한 항구 도시 브레멘. ⓒ KOKI

누가 독일, 그것도 한 겨울의 북부 독일 아니랄까 봐 하루 종일 꿀꿀하기만 한 날씨. 유럽에 도착한 이후 아직까지 볕다운 볕을 쬐어 보지 못했다. 사색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날씨 때문에 독일 철학이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 따뜻한 가로등이 길게 켜진 브레멘이지만 역시 우중충한 하늘에선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브레멘. 암스테르담에서 레바르든을 잇는 30여km의 제방길을 달려 도착한 브레멘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 도시 중 하나다. 이미 1358년에 한자동맹에 가입하면서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독일에서 함부르크 다음으로 중요한 항구도시라고 알려져 있다. 외해에서 남쪽으로 113km나 떨어져 있지만 말이다.


a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지어진 집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슈노어 지구.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지어진 집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슈노어 지구. ⓒ KOKI

그 화려했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자랑하듯 도시 곳곳은 화려하기만 한 모습. 여느 유럽 도시가 그렇겠지만, 브레멘 역시 시청을 중심으로 옛 시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앞에 서있는 높이 10m의 동상이 인상적이다.

칼 대제의 조카인 롤란트의 조각상인데, 도시의 자주 즉 한자동맹 도시인 브레멘의 자치권은 교황이 아닌 브레멘 시민들에게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브레멘의 지위는 브레멘에 있다’고 말하는 롤란트. 그래서 그는 성당을 향해 칼을 들고 서있는 걸까?

허나 정녕 시선을 끄는 것은 꼿꼿이 서있는 시청이나 성당, 동상이 아니었다. 친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벌써부터 기분을 내러 나온 시민들의 표정에서 북부 유럽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서점 지배인인 한스 쾨닉은 이미 한 달 전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비단 브레멘만의 일은 아니라고.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처럼 큰 명절도 없다고 한다. 모든 상점들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온 거리가 정겨운 불빛으로 수놓아진다고 한다.

시내 중심 거리에는 특별 상가가 마련되어 각종 과자와 소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히 들뜨기 마련이다. 마치 우리가 설이나 추석만 되면 할 일 제쳐두고 고향으로 향하듯 이곳 사람들 역시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 집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동화 같은 슈노어 지구를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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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KI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 여실히 느낄 수 있던 곳은 슈노어 지구였다. “이건 일루전이야!”라는 말을 입에서 떼지 않는 해얼이 형과 함께 걷기 시작한 슈노어 지역의 작은 골목길. 혹시 내가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기자기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곳은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만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슈노어 지구는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지어진 집들이 들어서있는 곳인데 당시에는 어부들이 주로 살았던 곳이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슈노어 지구는 바다에 바로 연결된 베저 강에 인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흥정으로 왁자지껄했을 어시장과 생선 비린내가 스며 있는 거리. 당시에는 이곳에서 거주하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생선도 잡고 무역도 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당시의 풍경이 어렴풋하게나마 그려진다.

물론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어부들의 집 대신 이 동네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들. 아직 꾸불꾸불 미로 같은 골목들이 상당수 그대로 남아있지만, 거리 자체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조용한 소도시의 작은 골몰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a 슈노어 지구에서만 18년째 배럴오르간을 만들어오고 있는 호케 드레호르겐씨.

슈노어 지구에서만 18년째 배럴오르간을 만들어오고 있는 호케 드레호르겐씨. ⓒ KOKI

“슈노어에서 배럴오르간을 만들고 있지요”

슈노어 지구에서만 18년째 배럴오르간을 만들어오고 있는 호케 드레호르겐의 말이다. 배럴오르간. 그 맑은 음색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라면 결코 잊지 못하는 소리. 예전에 비틀즈의 <헤이 주드>를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강한 인상이 박혔던 배럴오르간은, 악사가 원통을 직접 돌리며 짧은 못이 바람을 보내는 장치를 제어함으로써 그 특유의 맑은 소리를 내는 장치다.

예술가들의 작업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무 비행기와 자동차, 인형을 만들어 파는 상점 역시 슈노어 지구의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는 것들 중 하나. 이제 다섯 살이 되는 조카 대현이에게 사다 주면 삼촌에게 뽀뽀 한 번 더 해줄 것 같은 비행선 모형과 장난감 자동차들.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그것도 플라스틱이 아니라 푸근한 느낌이 나는 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서 그런 것일까? 일반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삭막한 느낌의 장난감들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이 나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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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KI

오후 5시, 바에서 들려오던 소리

슈노어 지구를 둘러보다 보니 벌써 오후 5시.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데다 해도 져서 그런지 사방은 어둡기만 했다. 그때 밤하늘의 비를 타고 들려오던 사람들의 소리. 예술가의 아틀리에와 장난감 가게 사이에 점점이 박혀있는 레스토랑과 바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독일인은 과묵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그들 역시 우리네처럼 기쁠 때 소리 지르고 술이 들어가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사람들이었다.

a 브레멘 음대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정명화씨.

브레멘 음대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정명화씨. ⓒ KOKI

오후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고 바에서 맥주를 걸치고 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독일에서만 11년째 살고 있는 정명화씨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유학생들이야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지만, 여기 사람들한테는 그냥 평범한 일이예요. 일이 끝나면 이렇게 바에 들러 한잔씩 하는 거죠. 가족들하고 오는 사람도 있고 혼자 오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고 보니 우리네 술집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쌓여있는 빈 술병들’과 ‘취해 엎어져 있는 주당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500cc짜리 맥주 한 잔 앞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그런데 별달리 이상한 광경도 아닌 것을 보고 드는 이 어색함은 뭘까?

우리 사회는 누가 뭐라 해도 관계가 많은 부분을 결정짓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선배나 상사가 술 한 잔하러 가자고 하면 마지못해서라도 가야 하는 분위기가 아직은 일반적. 아직도 적지 않은 논의와 사업들이 술을 앞에 두고 벌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승희 형도 할 말이 많은가 보다.

“중국이 꽌시(關係)를 중요시한다지만 우리 사회도 관계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아니냐. 술자리가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되거든. 안 가면 일을 할 때도 제대로 하기가 힘들어.”

그나마 조직에서 자유롭다는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는 승희 형. 그러나 그 역시 우리 사회에서는 관계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즉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직장에서 모임이 있으면 어쩔 수 없다고. 비단 직장 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집단에 비해 비교적 진보적이라는 대학 사회 역시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니 가족들과 함께 나와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광경이 사뭇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a “에이, 캠핑카 가서 맥주나 마시자!”

“에이, 캠핑카 가서 맥주나 마시자!” ⓒ KOKI

물론‘관계’라는 것이 인정이나 상대에 대한 관심 등 순기능도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 부작용들도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우리. 모임이 없다고 해서 이 시간에 나와 맥주를 한 잔 한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일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는 의식 때문인지 주5일제도 이르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오후 5시부터 바에 나가 한가로이 앉아 있다? 그는 분명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될 터.

우리와 독일 사이에 엄연한 차이가 존재함을 인식하게 된 브레멘. 단순히 벡스 맥주의 본고장 브레멘에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괜히 지나온 과거가 한탄스럽게 느껴졌던 걸까? 승희 형이 제안한다.

"에이, 캠핑카 가서 맥주나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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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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