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환' 일깨워준 10개의 황금덩이

[2003 나만의 특종]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등록 2003.12.19 07:39수정 2003.12.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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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성 고기압의 발달과 함께 대륙으로부터 몰아치는 차가운 겨울 바람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까지 불어오고 있다. 비로소 겨울을 맞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길고도 추운 겨울을 지낼 생각에 안심 반, 걱정 반인 복잡한 심경에 빠져든다.


‘모름지기 겨울은 추워야 하고 여름은 더워야 한다’는 속설이 설득력있게 들리는 이유는, 모든 생물이 그러한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오랜 시간에 걸쳐 발달시켰을 감각과 기능, 습성 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인간에겐 그런 변화에 맞추어 의식주와 관련해 발달한 관습과 문화란 게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욕심을 내세워 따뜻한 겨울을 바랄 수만도 없는 일이다.

나도 겨울의 깨질 듯 투명하고 차가운 공기와 펑펑 쏟아지는 흰눈을 사랑하지만, 겨울은 동면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내게도 추위가 찾아와 다행이라고 여기는 까닭이 한가지 있다. 바로 베란다에 걸어놓은 감 때문이다. 추위가 절정에 이를 즈음이면 달콤하고 쫄깃쫄깃한 곶감이 완성되어 하나씩 빼먹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a "제가 왕년엔 황금덩이 였습니다"

"제가 왕년엔 황금덩이 였습니다" ⓒ 장영미


내게 곶감을 만들어 보라고 권했던 앞집 부인은 이상 기온 탓에 곶감이 모두 엉망이 되었다고 푸념을 했다. 그 부인은 작년에 처음으로 곶감을 조금 만들어 보았는데 아주 맛이 있어서 올해엔 욕심을 내어 100개도 넘는 감을 깎아 걸어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만 날씨가 계속 따뜻한 데다 비가 자주 온 탓에 감 대부분이 곰팡이가 피었고, 종처럼 커다란 감 표면이 제대로 마르지 않아 가지에 매달린 채 물러져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뚝 떨어져버렸단다. 게다가 까마귀 녀석들까지 달려들어 쪼아 먹은 탓에 쓸만한 게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a 왕년의 황금덩이는 지금 9개 뿐

왕년의 황금덩이는 지금 9개 뿐 ⓒ 장영미


나도 온갖 촌스런 감상을 총동원하는 촌극을 벌이며 나만의 곶감을 만들겠다고, 그것도 단 10개뿐인 곶감을 만들겠다고 베란다에 감덩이를 걸어놓은 지 벌써 한달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고작 10개의 어린애 주먹만한 감덩이들을 걸어놓고 전세계 독자들을 상대로 내 치졸한 감상을 내보였던 때로부터 벌써 그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가던 ‘멍멍이’가 웃지나 않을 지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쓴 글 중 가장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니 그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뿐이다.

‘네 눈엔 그게 황금으로 보이냐?’고 질타하신 분도 계셨지만 대개는 내 감상에 동의해 주셨다. 적어도 겉으론 그렇게 보인다. 내 글을 퍼다 나르셨다는 분도 계셨는데 인터넷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떻게, 어디에 퍼나르셨다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a 이렇게 하면 10개 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하면 10개 처럼 보이지만... ⓒ 장영미


앞집 부인의 것과는 달리 10개 뿐이었던 나의 감들은 대부분 잘 마르고 있다. 대부분이라고 한 이유는 그 중 한개가 바람이 세차게 불었던 어느 날 가지가 부러지면서 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처럼 실이나 꼬챙이에 꿰어두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감 크기가 워낙 작았기 때문에 가지가 무게를 잘 견딜 수 있었고, 표면도 쉬이 말라서 곰팡이의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10개 뿐이어서 까마귀들도 우습게 보았는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미물인 까마귀조차도 많이 가진 자의 것에는 부리를 댈지언정, 없는 자의 등은 치지 않는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9개만이 줄에 걸려 있다. 매달아 놓은 줄의 길이가 들쭉날쭉 하다 보니 마치 악보 위에 그려진 음표를 연상시킨다. 바람에 흔들리는 곶감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녀석들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a 황금덩이는 지금...

황금덩이는 지금... ⓒ 장영미


재미있게도 1개가 떨어진 덕분에 내 특제 곶감의 맛을 미리 점쳐 볼 수 있었다. 겉표면의 1-2m 정도는 쫄깃쫄깃하게 굳어있었고, 속은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천연 잼 같았다. 딸아이와 반으로 나누니 내겐 한 입 거리도 안되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나머지 것들도 전부 먹고픈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요즘도 베란다에 나가면 ‘이 곶감들을 언제 먹어야 좋을까?’그 날을 점치느라고 손으로 만져보고, 눌러보고, 유심히 들여다 보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10개의 감덩이는 내게 황금덩이 이상의 값진 것을 주었다고 단언한다. 많은 기쁨을 주었을 뿐 아니라, 자연의 변화에 무지몽매했던 내게 자연의 변화와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을 갖게 해주었고, 두고두고 새겨야할 인생의 교훈도 깨닫게 했다.

a 하늘을 날고 있다? 하늘에서 내리고 있다?

하늘을 날고 있다? 하늘에서 내리고 있다? ⓒ 장영미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자연에 관해 참으로 아는 것이 없다. 교실에서 배운 것 말고는 자연 속에서 몸으로 터득한 지식이 거의 없음은 물론이고, 생존에 필요한 인간의 본능조차도 거의 퇴화된 것만 같다. 더구나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태어난 우리의 옛 것이나 전통, 풍습과 같은 쪽으로 가면 더 한심하다.

돌아보건대, 나는 참으로 ‘도시지향적’이고 ‘서양문물지향적’, ‘근대지향적’, ‘간단 편리지향적’, ‘소비지향적’인 삶을 살았다. 그것이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서 본래 가지고 태어났을 능력들을 스스로 방기해 버린 것이다.

지금껏 나는 늘 새 것을 추구해왔고, 서양문물과 문화를 동경했으며, 기계화된 편리한 삶을 좇았다. 현대적 감각의 신축 건물을 선호했고, 서양식 고급 요리를 찾아다녔으며, 세련된 인테리어의 까페를 좋아했다. 겉으론 안그런 척, 서양의 고급 브랜드, 일명 명품을 사랑했다. 그리고 시간없다는 핑계로 직접 만들기보다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아무 개성도 없는 물건들을 사서 쓰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글로 써놓고 보니 내 자신이 형편없는 속물인 듯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향했던 바’로 천박하게 드러내지도 않았으니 주변에선 설마 내가 그렇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나, 아니면 너나할 것 없이 비슷해서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름다운 것, 좋은 것, 맛있는 것’ 등을 누리고 소유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을 누리고 소유할 능력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때론 서로 다투어 온 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껏 내가 ‘아름답다고, 좋다고, 맛있다고’ 느꼈던 기준들과 감각 기능들이 지금 서서히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아니, 이미 조용한 변화를 넘어 전환점마저 돌았는데 이제야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a 여러분께도 나누어 드릴까요?

여러분께도 나누어 드릴까요? ⓒ 장영미


10개의 감덩이를 매달아 놓고 황금덩이라고 수선을 떨었던 것도, 이미 내가 그 전환점을 돌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내 속에 숨어있던 자연에 대한 그리움과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끄집어내주고,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깨우치게 해 준 것이 바로 그 황금덩이들이었던 것이다.

a 다른 집은 벌써 빼먹기 시작한 모양이다.

다른 집은 벌써 빼먹기 시작한 모양이다. ⓒ 장영미


서울 토박이인 내가 일본의 작은 지방도시에 흘러 들어온 지도 어언 2년째가 되어간다. 이런 촌구석에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을 지 막막했던 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쓴웃음마저 감돈다. 처음 1년간은 집정리하고, 꾸미고, 새 생활에 적응하며, 새 이웃들 사귀느라고 정신없이 흘러갔고, 2003년 올 한해는 공민관의 무료강좌와 <오마이뉴스> 덕분에 뜻깊게 보낼 수 있었다.

비록 5월말부터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의 목록을 보면 올해 나의 궤적이 거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 주부들과 함께 한국과 일본의 ‘저장 식품 담그기’에 열을 올리던 때의 내가 거기에 있다.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는 일에 ‘바람이 났다’고 들뜬 고백을 하는 내가 거기에 있다. ‘베란다에 꽃과 풀’을 몇 그루 심어놓고 자랑을 늘어놓는 철없는 내가 거기에 있다.

‘흙을 만지며 살 수 있는 집’을 꿈꾸는 내가 거기에 있다. 칠석과 추석 등 ‘한국과 일본의 풍습’을 이웃들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넉살좋게 엮어내는 내가 거기에 있다. 바다같이 넓은 ‘비와호(琵琶湖)’ 위에서 사람과 환경에 대해 고민하던 내가 거기에 있다. ‘환경을 생각하는 빨래’를 하겠다고 수건과 속옷을 팍팍 삶아대던 내가 거기에 있다.

그 이야기들 속엔 촌구석에서 살 일에 대해 걱정하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대도시에서의 생활이 그립다는 이야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경험들, 자연에 둘러싸여 신나게 돌아다니는 내가 있을 뿐이다.

a 일몰 속의 곶감덩이들

일몰 속의 곶감덩이들 ⓒ 장영미


나는 변화하고 있었다. 오랜동안 추구해왔던 것들을 한순간에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지금 난 전환점에 서있는 자신을 느낀다. 자연을 살리고 나를 살릴 인식의 전환점, 생활방식의 전환점, 생활환경의 전환점에 말이다. ‘소비의 갈망’으로부터 ‘생산의 기쁨’으로의 전환점에 말이다.

비록 어설픈 흉내내기에 불과할지라도, 곶감을 만들겠다고 정성스레 감을 깎아 베란다에 걸어 놓은 그 때로부터 주욱, 황금처럼 빛나던 탱탱한 감덩이가 쭈글쭈글 못생긴 주름살을 늘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황금덩이를 갈망하던 도시 여자는 지금 ‘패러다임의 전환’을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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