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아이'를 만드는 건 어른

[책읽기가 즐겁다 49] 박기범 동화모음 <문제아>를 다시 읽고

등록 2003.12.22 11:40수정 2003.12.2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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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제아> 겉그림입니다.

<문제아> 겉그림입니다. ⓒ 창작과비평사

<1> 좋은 책이라면 여러 번 읽습니다

참 좋은 책을 만났을 때 느낌이 어떤가요? 아주 반갑겠죠? 그런 책은 곁에 두고 싶은 한편 언제까지나 책꽂이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기 마련입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그렇게 두고두고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책을 한 권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하다고 봐요. 얼마나 좋겠어요. 온 삶을 이어가는 벗이니까요.


<문제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돈 안 되는 일'만 하는 사람이 지은 책입니다. `돈 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채로 살아온 서른한 해. 한글은커녕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살아온 할머님과 어머님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조그마한 공부방 교실에서 선생님 일을 했고, 몸이 안 좋은 아이들을 돌보면서 함께 지내는 일을 해오다가, 사람방패가 되어 이라크로 건너간 그 사람, 바로 박기범입니다. 지금은 파병을 반대하는 일을 하느라 `돈을 벌 수 있는 일'인 글쓰기와 책 내기를 못해요. 하지만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으니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보다 더 반갑고 소중할 수도 있지 싶어요.

그런 박기범씨가 지은 <문제아>라는 책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책 <문제아>는 여러 모로 소중하고 반가운 책이에요. 벌써 두 번쯤 읽었고, 이번에 새로 다시 읽었습니다.

<2> 재주나 힘보다는 착한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


박기범씨 동화모음 <문제아>를 다시 읽은 까닭이 있어요. <이오덕 책 이야기,한길사(2002)>를 읽으니 그 책에 박기범씨 동화모음 <문제아>를 비평한 글이 있었거든요. 이오덕 선생님은 박기범씨를 두고 요즘 작가들이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다루지 않는 소중한 이야기를 아주 잘 풀어서 썼다고, 교육자로 학교에 있지 않으면서도 교사였던 자기보다도 학교 이야기와 아이들 이야기를 더 잘 썼다는 칭찬하는 한편 여러 대목에서 너무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갔다고 따끔하게 꾸짖습니다.

<문제아> 비평을 곱씹으면서 다시 살피니 참 맞아요. 맞으면서도 반갑습니다. 저는 그저 너무 좋게만 보지 않았나 싶어서요. 그래서 찬찬히 책을 다시 더듬습니다. 머리말부터 살펴보았어요.


.. 힘센 아이보다 씩씩한 아이가 더 좋다고, 씩씩한 아이보다 착한 마음 그대로인 아이가 더 좋다고. 뭣도 잘하고 뭣도 잘하는 그런 아이보다도 착한 마음씨 그대로인 아이가 제일 아름답다고, 그런 얘기를 마음이 찡해지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책 속 이야기도 그대로 슬픈데 어떻게 나만 혼자서 신나 하나? 어떻게 좋은 말로 잘난 척만 할 수 있나? <머리말-박기범>

박기범이라는 사람을 아무것도 모르던 때 <문제아>라는 책을 책이름만 보고 집었습니다. 책이름이 남다르다고 느꼈고, 무언가 소중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고 느꼈거든요. 책을 펼치면서, 역시나 맞구나, "뭣도 잘하고 뭣도 잘하는" 아이보다는 "착한 마음씨 그대로인 아이"를 가장 아낄 수 있는 마음이구나, 그래서 이 책을 따뜻하게 읽을 수 있고, 문장과 줄거리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안타까움을 보면서도 즐겁게 읽고 칭찬할 수 있구나 싶어요.


동화모음 <문제아>는 `문제아'라는 짧은 이야기를 복판에 놓고 아홉 가지 짧은 이야기를 묶었습니다. 모두 열 가지 이야기인데, 이야기마다 고단하게 일하면서도 설움받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이야기가 많아요. 하지만 힘없고 가난하다고 구질구질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가난함과 힘없음 속에서도 소중한 사랑, 믿음, 나눔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예요.


.. 아빠는 많이 배운 사람 가운데는 좋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너무 어려운 것들은 머리 속에 꽉꽉 채워 넣느라고 제일 쉬운 것들을 잊어버려서 그럴 거다 했다. 아빠는 오빠에게 너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공부한답시고 어려운 거 머리 속에 담는다며 제일 쉬운 것들을 까먹지는 말라고. 그래 놓고는 제일 쉬운 것이 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 "손가락 무덤 (21쪽)"



동화모음 <문제아>가 지닌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는 `어른이 교훈을 심지 않는다'는 것이 예요. 첫글 "손가락 무덤"에서도 말하듯 "공부한답시고 어려운 거 미로 속에 담는다며 제일 쉬운 것들을 까먹지는 말라"면서 "제일 쉬운 것이 뭔지는 말해 주지 않"아요. 스스로 찾게 만듭니다. 스스로 세상을 겪고 부대끼면서 느끼도록 이끌어요. 다만 아이들이 하도 공부에 치이고 들들 볶이기 때문에 "공부가 제일 소중하지는 않다"고 말을 할 뿐이에요.


<3> 나누는 삶을 말하는 이야기들


"독후감 숙제"는 콩나물 장사를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집안 이야기를 다룹니다. 콩나물을 팔 때 신문지로 봉투를 접어서 담아 판다고, 헌 신문지를 주워와서 어머니와 아이가 봉투를 접는데, 아이는 신문지를 주워오다가 신문지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책>이라는 책을 만나요. 마침 학교에서 독후감 숙제를 써오라고 했기에 그 책을 가져왔는데,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만화를 맨 먼저 보았다지요. 그 만화는 오세영씨가 그린 <부자의 그림일기> 한 대목입니다.


.. 그 애는 분명 운동회 날 말고도 늘 그랬을 거다. 아마 미술 시간, 음악 시간이 제일 싫을 거다. 준비물이 많아서다. 그림 재로, 만들기 재로는 할 때마다 달라진다. 음악 시간 악기도 비싼 게 많다. 뻔하다. 소풍이 싫고, 학예회가 싫을 거다. 견학 가는 게 싫고, 애들 생일날도 그랬을 거다. 그런 거 말고도 어린이날, 스승의 날, 크리스마스처럼 무슨 날들도 다 마찬가지다 .. "독후감 숙제(51쪽)"



곧 성탄절입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목소리가 나와요. 가난한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 더 추우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은 성탄절 선물을 줄이지 않으면서 이웃을 돕지 않아요. 나눔이란 자기에게 여분으로 있는 나머지를 주는 게 아닙니다. 콩 한쪽을 나누듯 말이에요. "독후감 숙제"에서는 학교 이야기와 어렵게 사는 아이 이야기를 다룹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참답게 나누는 소중한 삶이 있어야 좋음을 말합니다.


.. 나는 나를 문제아로 보는 사람한테는 영원히 문제아로만 있게 될 거다. 아무도 그걸 모른다. 내가 왜 문제아가 되었는지, 나를 보통 아이들처럼 대해 주면 나도 아주 평범한 보통 애라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딱 한 명 있다. 봉수 형이다 .. "문제아 (89쪽)"



<이오덕 책 이야기>에서 <문제아>를 두고 `높임말'을 쓰지 않는 대목이 좋았다고 이야기해요. 사실 많은 동화 작품에서는 한결같이 `높임말' 해요체를 씁니다. 하지만 너무 어설프거나 어줍잖은 높임말이 많아요. 제대로 못 쓴다고 할까요. 그리고 아이 느낌이나 말투와는 사뭇 다르게 해서 정감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아>는 아이들이 어른한테 꼬박꼬박 높임말을 쓰지도 않고 글투도 예삿말이에요. 그런데 이처럼 쓴 예삿말 글투가 참 좋습니다. 오히려 더 나긋나긋하면서 가깝게 다가와요.

털털하고 꾸미지 않고 감추지 않고 속이지 않아서 그럴까요? "착한 마음씨 그대로인 아이가 제일 좋다"는 박기범씨 말대로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며 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훨씬 아름답고 재미나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문제아>이지 싶습니다.


<4> 어린이 눈길에서 바라보는 어린이 모습으로


요즘은 노동자나 농민 이야기를 많이 씁니다. 하지만 아직 노동자와 농민이 꾸린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그린 이야기는 드물고 농익지 못해요. 박기범씨도 여러 모로 아쉬움이 있으나 자기 마음을 열고 탁 트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털털하게 그려나가기에 아이만이 아니고 어른에게도 사랑을 받는 <문제아>를 펴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산업재해로 손가락을 잃은 아버지를 둔 아이 이야기인 "손가락 무덤", 정리해고로 갈갈이 찢어진 두 피붙이 집안에서 자라는 아이 이야기인 "아빠와 큰아빠", 오세영씨 만화 <부자의 그림일기>에 나오는 `나부자'와 비슷한 처지로 어렵게 사는 딸아이가 `작은 책'이란 잡지를 읽으며 쓴다는 "독후감 숙제".

가난한 동네에서 찬밥 대접받고 출세 못할까 걱정하는 어머니가 주소를 옮겨 잘 사는 동네로 학교를 보내 속으로만 가슴앓이하는 아이 이야기인 "전학", 한 번 낙인찍고 또 낙인찍으며 사람을 사람으로 똑같이 보지 못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문제아가 되는 아이 이야기인 "문제아", 참 교사가 이끄는 아이들 이야기인 "김미선 선생님".

철거민 동네에서 슬픔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가 보는 눈길로 쓴 "끝방 아저씨",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고 늘 주린 살림 잇는 농사꾼을 이해하게 되는 도시 아이 이야기인 "송아지의 꿈", 박래전 열사 딸아이가 자라며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시나브로 알아 가는 "겨울꽃 삼촌", 장애를 가진 동물도 똑같은 생명체로 봐야 한다는 "어진이"까지 모두 열 꼭지입니다.

이야기 열 꼭지는 하나같이 어린이가 복판에 있어요. 생각도 어린이에게 맞췄고 말투도 느낌도 어린이에게 맞췄어요. 그러나 어떤 이들은 <문제아>가 너무 `현실'을 담으려 해서 아이들에게 그릇된 생각을 심어 주지 않겠냐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걱정이 아니라고 봐요. 아이들이 지금 살아가는 현실인데요. 아이들은 자기가 어떠한 현실에서 살아가는지 알아야죠. 아이들 현실에 눈감지 말고, 아이들 현실을 비켜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요. 그래야 문제를 풀 수 있어요. 그래야 아이들이 참으로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게 무언지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참된 풀이법을 찾을 수 있어요. 어린이뿐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함께 즐겁게 살아갈 삶을 찾고 살필 수 있고요.

어른 눈길로 어린이 세계를 보는 게 아니라, 어린이 눈길로 어린이가 살아가는 세계를 보고 현실을 깨달아야 좋아요. <문제아>는 바로 어린이 눈길로 어린이 삶을 살피면서 어린이를 제대로 느끼자고,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가꾸자고, 누구보다도 우리 어른들이 마음을 똑바로 고쳐먹고 생각을 추슬러서 "어른 먼저 착한 마음씨를 지니자"고 말합니다.


<5> 몇 가지 아쉬움


아이들도 외치고 싶습니다. 자기 할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을 갖도록 가르치지도 않아요. 우리 언저리에 있는 아이들이 무얼 하는지 한번 살펴보아요. 지금 이 모습이 참말로 아이들을 걱정하는 모습일지 살펴보아요. 어린 나이부터 "돈 잘 벌며 떵떵거리며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올라서서 킥킥 웃는 기계"를 만들지 말고요. 겉멋에 들리지 않고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도 즐겁고 신나는 삶을 헤아리는 마음으로요.

마지막으로 책을 다시 읽으며 든 아쉬움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문제아'가 아니라 `문제아이'라고 했어야 더 알맞습니다. `아(兒)'가 아니라 `아이'니까요. 다음으로 `제일(第一)'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쓰는데 `아주-가장-무척' 같은 말로 고쳐서 쓰면 좋겠습니다.

그밖에도 다듬으면 좋을 말이 많아요. 말 문제는 박기범씨도 아직은 아이들 말을 두루 살피지 못한 한편, 아이들 말도 안 좋은 말로 많이 물들어 있기도 하고, 어른인 우리들도 안 좋은 말로 물든 줄을 잘 모르기 때문에 모르고 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작품을 다 쓴 다음에 낱말을 하나씩 다시 살피면서 다듬으면 더 좋겠습니다.

문제아

박기범 지음, 박경진 그림,
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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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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