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겉그림
- 들꽃처럼 맑고 고운 산골 아이들 이야기- 라는 부제가 붙은 <수경이>는 고인이 된 임길택 선생님의 유고집이다. 수필처럼 쓰인 단편이 1부와 2부를 차지하고 3부에 <수경이>라는 중편이 실려있다.
서문에는 권정생 선생님의 햇빛 같은 맑은 칭찬의 말이 있다. 정성을 들인 따뜻한 글이라서 선생님 생각이 절로 난다고 했다. 줄거리가 뚜렷하지 않고 큰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의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부인이 대신 써 내려간 작가의 글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가고 없는 작가의 작품이어서 일까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한 흔적을 찾아보려 애를 쓰지 않아도 마음으로 읽혔다.
수경이네는 대가족이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올케, 조카인 승연이, 둘째오빠, 언니가 등장한다. 수경이가 돌봐야 하는 짐승까지 수경이를 둘러싼 환경은 노동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수경이는 공부 잘하는 둘째 오빠와 언니의 반도 못 따라가는 평범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다. 할머니 밥상 차리기 조카 승연이 돌보기 짐승 돌보기까지 집안의 잔 일을 도맡아 하는 아이다.
얼핏보면 수경이네 집안 배경에서 희망은 너무나 멀어 보인다.
농촌 총각 신세를 면하려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으로 떠난 큰오빠는 그곳에서 만난 올케와 살림을 차린다. 맞벌이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승연이를 수경이네 집에 보낸다. 부모님의 피땀이 어린 농산물을 당연히 가져가면서 돈 한푼 보태지 않은 큰오빠는 수경이에게 결코 편안한 대상은 아니다. 승연이는 할머니의 영역 안에서 수경이를 괴롭히고, 수경이가 누려야 할 사랑을 뺏어 가는 존재이다
대학생의 신분으로 군대에 간 둘째 오빠는 제대를 앞두고 있다. 오빠의 제대는 학비를 감당해야 하는 부모님의 걱정으로 이어진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갔다 견디지 못해 내려와 읍사무소 사환노릇을 하면서도 진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언니가 있다.
적은 봉급을 모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 진학을 꿈꾸는 언니를 못마땅해하는 엄마에게둘째 오빠는 진지하게 배움의 필요성을 이해시킨다. 엄마는 자신의 의지보다 기대하는 둘째 오빠의 힘에 편승하여 언니의 진학을 지지하는 남녀 차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수경이에게 언니의 열띤 배움의 열망도 고단한 노동을 요구하는 일상으로 다가온다. 남의 논을 힘겹게 경작해야 하는 부모님의 수고로부터 독립될 수 없다. 노동의 힘겨운 굴레를 자식에 대한 희망으로 버티는 수경이 엄마 아버지 모습은 피폐한 농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작품 서두에 등장하는 돼지우리 위의 변소는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의 에피소드를 연결시켰다. 부끄러워하는 수경이에게 환경론까지 거론하는 담임선생님의 연결고리는 장황하지만 작품 말미에서는 어떤 연관성도 없어 지나친 상세 묘사에 그치고 있다. 시대상을 그린 두엄자리니 요강이니 하는 단어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예기치 않은 태풍으로 쓰러진 볏짚을 세우다 집으로 도망쳐온 수경이는 꿈을 통해 자신의 게으름을 질책한다. 꿈에서 죽음의 다리를 건너는데 많은 사람들 중 가장 초라한 모습의 부모님을 발견한다. 돈이 있어도 옷 한 벌 사 줄 수 없는 수경이는 게으른 손바닥을 들켜 죽음의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 어린 수경이에게는 가혹한 꿈이다.
수경이를 골려주는 골칫덩어리 승연이와의 갈등은 제사 때 내려온 올케언니와의 눈물을 통해 화해를 한다. 옥수수 대를 낫질하다 벤 손가락에서 피나는 승연이에게 약을 발라주는 친절을 통해 승연이에게 정다운 고모가 된다. 꽃 이름을 알려주면서 자기처럼 공부 못하는 아이는 되지 않았으면 한다. 올케언니 걱정이 생각나서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강아지 복실이가 난 새끼들이 눈도 뜨지 않은 눈으로 젖을 빠는 모습과 우편배달부를 보고 성나게 짖는 복실이에게서 모성을 느끼며 비로소 승연이의 아픔을 이해한다. 골칫덩어리에서 엄마 없이 자라나는 슬픔을 이해한다.
'개미들이 일하면서 무슨 생각할까 울 엄마는 일하면서 집 살 생각하는데' 라는 대사는 어린 승연이의 생각치곤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외로움을 우회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철학적이다.
단순한 농촌 현실을 풀어쓴 것이 아닌 가난한 수경이네 가족사를 통해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농촌총각의 현실과 남녀차별과 고달픈 노동의 부모님과 자연의 변화를 예고하는 태풍과 변소우리 밑의 돼지를 통한 환경문제와 선생님의 학습방법까지 다양함이 펼쳐져 있다.
대가족의 막내 수경이가 겪어내는 현실은 때때로 답답하기까지 하지만 교사생활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현장감 있는 아이들 지도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풀꽃의 이름을 알고 무당벌레의 살랑거림을 느끼는데 학교 공부가 소용이 없다는 다소 철이 일찍 든 수경이가 돈에 대한 강박증을 꿈을 통해 나타낸 것이나 꿈과의 연관성은 그대로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이 아쉬웠다.
수경이는 변화하는 자연의 느낌을 알고 복실이의 엄마마음도 알고 승연이를 위하는 고모도 되고 할머니 밥상을 엄마대신 차릴 수도 있고 짐승들의 배고픈 소리도 구별해 낸다. 생일을 기억 못하는 엄마를 원망하는 대신 송아지와 함께 생일을 같이 하기로 하고 상상을 재현해 꽃다발을 걸어준다. 수경이는 다소 복합적인 인물이다.
불현듯 무엇이든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무엇이든 해 내겠다는 자기 암시는 순수한 수경이의 심성과는 어긋나 보였다. 오히려 앞에서 보여준 순수하고 정감 넘치는 수경이 이미지를 밀어내는 격이 되었다. 고학년들에게도 고난도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는 것은 복합적인 인물을 이해하는 능력에서의 소견이기를 바란다.
책 제목이 사람 이름인 책들을 즐겨보는 나는 수경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조카에게 상세한 꽃이름을 알려주고, 사마귀의 알을 소중하게 여기고, 볏집을 세우다가도 도망가는 이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공부를 잘해서 야무진 수경이보단 짐승의 배고픈 소리를 구별해 듣는 귀를 가진 선량한 막내이기를 바란다.
외진 산골이나 바닷가, 석탄을 캐내는 마을에서 들꽃처럼 살다 가신 고 임길택 선생님이 병과 힘들게 싸우면서 써 놓은 동화를 통해 들풀의 아우성과 고향집 마당에 쏟아지던 별무리들을 다시 만났다. 고단한 몸으로 사립을 들어서던 아버지 어머니가 그립다.
수경이
임길택 글, 유진희 그림,
우리교육,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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