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해넘이는 반구정이 어떨까?

황희 정승과 분단의 역사를 생각하는 곳

등록 2003.12.25 14:27수정 2003.12.2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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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에서 본 해넘이
반구정에서 본 해넘이김정봉
2003년 세밑 해를 보낼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반구정이라는 좋은 곳을 찾았다. 적당한 곳이라 하면 집에서 가깝고 정자라도 있으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생각되는데 반구정은 이 두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물론 좀더 멀리 서해 쪽으로 가면 이보다 못할 곳이 없지만 31일 저녁5시 정도에는 그 곳에 가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곳을 제격이라 판단했다. 여기가 제격인 이유는 시간 제약을 받지 않는 '혜택 받은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하루하루 바삐 움직여야 되는 우리네에게는 서울에서 한시간 남짓 걸려 닿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로를 한참 달려 통일동산이 있는 오두산을 지나 문산IC로 빠져나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문산, 왼쪽으로 가면 반구정이다. 마을길을 따라 얼마가지 않으면 갈비냄새가 반구정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준다. 갈비 집인지 반구정 입구인지 헷갈릴 정도로 큰 갈비 집 옆에 반구정은 자리하고 있다.

반구정(伴鷗亭)은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곳이다. 갈매기와 짝을 이룬다 하여 반구라 하는데 이름 한번 멋있게 붙였다. 그는 시조에도 나타냈듯이 임진강가에 나가 낚시질도 하면서 한정(閑靜)한 여생을 보낸 듯하다.

강호에 봄이 드니

강호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희는 밧츨가니
뒷 뫼에 엄긴 약을 언제 캐려 하나니


반구정은 임진강을 보며 한가로이 서있다
반구정은 임진강을 보며 한가로이 서있다김정봉
누구나 꿈꾸는 생활이지만 평범한 세인은 그럴 여유가 없어 못하고 그럴만한 여유를 가진 자들은 그렇게 하려하지 않는다. 말년에까지 욕심을 채우기에 바빠 자기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나는지도 알아채지 못한 채 불쌍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반구정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개축한 것이어서 예전의 모습은 사라져 건축물이 주는 깊은 맛은 없지만 정자가 자리한 터는 예전에 있었던 그 자리일 것이므로 그 분의 자취는 더듬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반구정/건물은 새 것이나 자리한 터는 예전 그대로다
반구정/건물은 새 것이나 자리한 터는 예전 그대로다김정봉
임진강 강물 위로 바로 치솟은 옹색한 언덕에 반구정이 비집고 서있고 그 보다 조금 높은 곳에 앙지대가 있다.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슴푸레할 때 나무는 언덕에 숨어 반구정과 앙지대만 여인의 젖가슴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다.


반구정과 앙지대
반구정과 앙지대김정봉
그래서 반구정은 녹음이 우거진 한 여름보다 정자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겨울이, 햇살이 눈부신 한 낮보다 철조망이 드러나지 않는 해질녘이 더욱 좋다.

반구정에 오르면 앞으로 반쯤 얼은 임진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연천, 적성, 파주, 장단을 거쳐 이 곳 반구정 앞을 흘러 지금 통일전망대가 세워진 오두산 앞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흘러간다. 북녘 땅에서 출발하여 자유로이 흘러오는 임진강물은 우리에겐 다른 감정을 갖게 한다.

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
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김정봉
강 너머 북녘 땅 산등성이 사이로 해가 뉘엿뉘엿 기운다. 제 집 없는 철새는 V자를 그리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기운 햇살은 강을 두르고 있는 철조망을 비추는데 힘이 없어 녹이진 못하고 붉게 물들이고 있다.

반구정에서 본 일몰
반구정에서 본 일몰김정봉
뒤를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황희 정승 동상이 있고 그 왼편으로 방촌영당이 있다. 방촌영당은 황희 정승의 영정을 봉안했던 곳이다. 바로 옆에는 제사를 모시는 영모재가 있다. 모두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어서 반구정이 그려내는 정경의 액세서리 정도로 보면 된다.

방촌영당
방촌영당김정봉
2003년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우왕좌왕'이 선정됐다. 그 뒤를 점입가경, 이전투구, 지리멸렬, 아수라장 등이 잇고 있는데 사자성어 자체가 원래 희망적인 것은 드물고 비꼬는 말이 많지만 올해는 더욱 그런 것 같다.

2003년 나쁜 것은 이 해에 보내고
2003년 나쁜 것은 이 해에 보내고김정봉
내년에는 장진지망(長進之望 장차 잘 되어 갈 희망), 전도양양(前途洋洋 장래가 매우 밝음), 전도유망(前途有望 앞으로 잘 되어 나갈 희망이 있음), 함포고복(含哺鼓腹 배불리 먹고 즐겁게 지냄), 태평성대(太平聖代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 등의 사자성어가 뽑히길 빌어본다.

2004년은 좋은 일만 있기를 빌어본다
2004년은 좋은 일만 있기를 빌어본다김정봉
난 이 곳을 찾기 전 분단, 이산가족, 통일한국, 남북통일이라는 무거운 낱말을 고의로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임진강변에 둘러친 철조망과 강 건너 북녘 땅, 그 땅을 자유로이 날고 있는 철새들은 내 마음을 조여온다. 이렇게 또 가는 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인가 보다.

붉게 물든 철조망
붉게 물든 철조망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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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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