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때 신발 챙겨주던 특별한 아이들

등록 2003.12.26 16:40수정 2003.12.2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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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결성과 함께 교단을 떠났다가 10년 만인 98년 9월말 충남 부여에 있는 세도중학교에 복직할 때 이야기입니다.

지역방송에서 10년만의 복직을 취재하겠다고 따라 와서 TV카메라와 함께 첫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난감했지만 이미 학교에서 취재해도 좋겠다는 허락을 받아 놓았다니 강하게 거절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장학사 한 분만 와도 학교가 손님맞이 한답시고 법석인데 방송카메라가 왔으니 전날 아이들이 청소에 얼마나 시달렸을지 짐작이 가서 미안했습니다.

교감선생님의 과장된 환영, 교무실 선생님들과의 어색한 인사, 촬영을 위해 10년만에 돌아온 교실에서 준비도 없이 하는 아이들과의 만남과 수업 등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마냥 불편해하면서 하루를 지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교실에서 창 밖을 보며 지난 세월을 생각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다짐하는 연출된 모습까지 무사히 촬영을 마쳤습니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선생님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우루루 카메라를 따라 몰려다니던 아이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촬영 팀을 배웅하고 퇴근 준비를 하려는데 슬그머니 다가온 아이가 진철이였습니다. 혼자였습니다.

"내일도 방송국 카메라가 오느냐, 오늘 찍은 것은 몇 시에 방송되는냐, 선생님은 유명한 사람이냐, 1학년인데 우리 반을 가르치게 되느냐, 집은 어디냐…"

참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퇴근 시간까지 가지 않고 곁에서 말을 시키더니 선생님들이 일어서자 먼저 현관으로 달려 나갑니다. 선생님들의 신발을 꺼내 가지런하게 놓아주고, 벗어 놓은 실내화를 신발장에 챙겨 넣습니다.

그러다 내가 나오자 난감해합니다. 내 신이 어디 들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맨 아래 칸에서 신을 꺼내 신자 재빨리 실내화를 집어 들더니 중간쯤의 한 칸을 가리키며 '여기가 비었으니 내일부터는 이곳에 넣으라’고 알려줍니다.


다음날 사실상 첫 출근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학교에 닿았습니다. 아직 아이들도 별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진철이는 벌써 와서 중앙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문에 들어서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얼른 실내화를 꺼내 신기 좋게 놔두고 달려와서 가방을 빼앗아 듭니다.

벗은 구두를 신발장에 넣어 주고는 또 앞서 달려가 교무실 문을 열어줍니다. 내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더니 컴퓨터까지 켜 주고는 씨익 웃습니다. 하는 짓이 고맙고 그 표정이 귀엽습니다. 첫 출근 날 참으로 귀한 선물을 받은 느낌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현관으로 가서 다음 선생님을 기다립니다. 교감선생님이 나타날 때까지 일찍 오는 모든 선생님을 진철이는 매일 이렇게 맞이합니다. 교실에 들어가 조용히 자습하라는 교감 선생님 때문에 억지로 교실로 들어갈 때까지 말입니다.

어쩌다 출장으로 교감 선생님이 늦게 나오시는 날이면 진철이는 끝까지 모든 선생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교실에 가도 특별히 공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선생님들이 모두 알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가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특수학급을 만들어서 지도해야 하는 아이들이 매년 한두 명씩은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며 지내는 안타까운 일이 늘 벌어집니다.

학교에 사랑의 우체국을 만들었습니다. 친구들과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서로 답장을 해 주면서 사랑과 우애를 나누게 하고 싶었습니다. 말로 하지 못하는 얘기를 주고 받으며 관계가 더 넓고 깊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글쓰기 지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고 컴퓨터나 TV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었습니다. 정성껏 펜으로 쓴 편지를 받는 기쁨을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이들이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진철이는 편지가 오지 않습니다. 친구가 없기 때문이지요. 내가 먼저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를 들고 다니며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편지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짧은 답장이 왔습니다. 물론 다시 답장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 가운데 진철이에게 편지 보내는 여학생들이 생겼습니다. 그 아이들은 평소 편지를 받지 못하는 친구들이나 행정실 직원들, 급식실 어머니들, 교장·교감선생님들께도 편지를 썼습니다.

진철이는 받은 편지를 차곡차곡 모아 늘 가방에 넣고 다니며 "나, 오늘까지 편지 몇 통 받았게요?"하고 물으면서 자랑합니다. 소외된 외로운 이웃에 눈 돌릴 줄 알게 된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진철이에게 친구가 생기고 학교 다닐 새로운 이유가 하나 더 생겨서 기뻤습니다.

다음 해 한수가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한수는 장애가 더 심합니다. 이름 말고는 한글도 쓰지 못하고, 발음도 제대로 안 돼서 말을 알아듣기도 힘듭니다. 진철이가 성적은 나빠도 친구들과 의사소통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단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정도였는데 한수는 아예 의사소통이 어렵습니다.

이제 중앙 현관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둘로 늘었습니다. 서로 먼저 선생님 신을 꺼내거나 가방을 받아 들려고 싸우기도 하지만 둘이는 친하게 지냅니다. 점심 시간에도 꼭 함께 밥을 먹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출근하셔도 한수는 남아서 끝까지 선생님들을 맞습니다. 한수에게는 교감 선생님조차 자습하러 가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 출근이 끝나면 한수는 행정실로 갑니다. 그리고 학교에 작은 작업이라도 있으면 교실에 갈 생각은 않고 아저씨들과 함께 일을 합니다. 가지치기한 나무를 나르기도 하고, 나무 옮겨 심는 일을 돕기도 합니다.

한수는 삼 년 내내 행정실장을 담임 선생님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사람 좋은 행정실장과 직원들도 자식처럼 한수를 아끼고 많은 얘기를 주고받습니다. 일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말하는 법을 가르치려 애씁니다. 한수에게는 행정실 아저씨들이 진짜 선생님이셨습니다.

전교조 본부에 1년간 파견돼서 상근을 하고 돌아오니 한수만 맞아줍니다. 진철이는 근처 실업계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친구는 없어도 행정실이 있어서 한수는 행복합니다. 가끔 한수는 '어이, 국어!' 이렇게 나를 부르며 장난을 칩니다. 가끔 사탕을 주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여학생 이름을 행정실장이 알아내서 그 이름을 쓸 수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 이름을 종이에 써서 내게 보여 주면서 '태숙이, 이뻐'하고는 다시 그 종이를 소중히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돌아서기도 합니다.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질퍽거리며 교문까지 달려와 선생님들의 가방을 들어주며 반기던 한수도 이제는 졸업하고 없습니다. 다시 해직된 후 학교에 더러 들를 때 반겨 주는 진철이와 한수가 없다는 것이 매우 허전합니다.

그 아이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정과 사랑을 주었는지 난 그 아이들이 떠난 뒤에야 겨우 알아챕니다. 두 아이가 건강하게 커서 사회에서 맡은 몫을 훌륭히 해 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인간이란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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