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쾡이의 앙칼진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살쾡이가 살아있는 뒷산이야 말로 신이 존재하는 신성한 사원입니다

등록 2003.12.28 23:09수정 2003.12.2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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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엄마 코고는 소리가 이상하다?”


방학을 맞이해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큰 아이 인효 녀석이 갑자기 잠자는 엄마에게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 고개를 짜웃 거렸습니다.

“아빠 잘 들어봐 엄마 코고는 소리가 고양이 소리 같어”
“엄마는 코 안 고는디, 어? 그래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그렇지, 카~옹 카~옹, 고양이가 화 나 있는 소리 같지”

밤 10시쯤이면 우리 네 식구는 한 밤중입니다. 마을에서 약간 외떨어져 있는 우리 집은 온통 어둠에 에워싸이게 됩니다. 하늘에 총총한 별빛이 전부입니다. 지구상에서 오로지 우리 네 식구만이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세상이 고요합니다.

나는 아내에게 바싹 다가가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아내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명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려 보니 집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였습니다. ‘캬~악, 캬~아욱’ 하는 소리와 함께 간간이 동네 개들이 짖고 있었습니다. ‘캬~아옥 캬~욱’ 저 멀리 뒷산에서부터 들려 오는 소리였습니다.

앙칼진 소리는 분명 뒷산에 살고 있는 살쾡이 소리였습니다. 살쾡이의 기세 등등한 소리가 뒷산을 쩡쩡 울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잽싸게 캠코더를 꺼내 들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벼르고 별렀던 소리였습니다. 몇 년 전부터 녀석이 내지르는 생생한 소리를 담아 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캠코더를 들고나올 때마다 그 소리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했습니다.


“캬~아옥 캬~아욱”

밖으로 나오자 잠든 세상을 사정없이 깨뜨려 놓고 있는 살쾡이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아주 건강한 소리였습니다. 나는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며 두툼한 어둠에 덮혀 있는 뒷산을 향해 캠코더를 작동시켰습니다.


말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인효에게 캠코더에 녹음해 온 살쾡이가 내지르는 생생한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쉴 사이 없이 질문공세를 펼칩니다.

“아빠 살쾡이는 뭘 먹고 살어?”
“산토끼나 다람쥐 같은 거, 노루도 잡아먹힐지도 모르지….”
“사람도 잡아먹어”
“아니, 사람 보면 도망가“
“왜?”
“무서우니까”
“사람이 왜 무서워….”
“그냥….”

나는 ‘세상에서 젤 무서운 동물이 사람이거든’ 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그 대신 살쾡이가 우리 집 뒷산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살쾡이는 우리 집 뒷산에서만큼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산토끼며 청설모며 얼마 전에 산 속에서 마주친 오소리며 혹은 노루까지 잡아먹어 가며 살아갈 것입니다.

흔히들 대자연은 신의 일부이며 신 그 자체라고들 합니다. 대자연과 신이 하나라고 가정해 놓고 본다면 자연의 질서가 잘 지켜지고 있는 공간은 분명 신이 존재하는 사원과도 같은 곳일 것입니다.

신이 존재하는 사원 또한 따로 없다고 봅니다. 우리 집 뒷산이야 말로 신이 존재하는 신성한 사원이기도 합니다. 내게 있어 뒷산은 온갖 욕망을 채워나가는 그 어떤 인간의 사원이 아닙니다. 삿된 욕망을 채워 줄 설교자도 없습니다. 설교가 필요없는 신성 그 자체입니다.

나는 요즘 거의 매일같이 새벽 산행을 하는데 오늘은 여느 때와는 달리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가듯 마음가짐을 바로 해 보았습니다. 폭신한 낙엽 방석에 앉아 있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제 밤 살쾡이의 쩡쩡한 외침은 어쩌면 더 이상 신성한 공간을 파헤치지 말라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경고음일지도 모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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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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