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물줄기에 한해를 띄워 보냅니다

등록 2003.12.29 11:43수정 2003.12.29 16:0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른 봄 연초록으로 뒤덮인 영월의 들녘처럼 부드럽게 살고 싶었습니다. 봉래산에 단풍들 무렵 갖가지 색깔이 시기와 질투도 없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모습을 배우고 싶은 한 해였지요. 그런데 돌아보니 찔레 덩굴이며 아카시아 줄기처럼 가시에 날 세우고 살아온 나날이었습니다.


2003년 12월 29일 계족산에서 내려다 본 남한강
2003년 12월 29일 계족산에서 내려다 본 남한강이기원
몇 년째 되풀이되는 고 3 담임이라 3월 초엔 큰 부담이 없었지요. 예전처럼 상담하고 격려하고 밤늦게까지 감독하며 지내다 보면 수능고사 보고 원서 쓰고 그러면서 일년이 지나갈 거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육체적으론 힘들어도 순하고 착한 녀석들과 일년을 살아내고 보면 아쉬움도 없지 않겠지만 보람도 있을거라며 시작한 한해였습니다.

그런데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를 둘러싼 회오리 앞에서 고 3 담임이라고 외돌아 앉아 있을 수는 없었지요. 대부분 담임들이 NEIS를 통해 담임 업무를 진행하는데도 인증조차 거부하며 한 학기를 보냈습니다.

인증 받고 업무를 시작하는 선생님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소수의 사람들이 겪어야 할 마음 고생은 몇 갑절로 늘어난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며 살았지요. 이러다간 아마도 3학년 담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할 거란 위기감을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밤이 되면 자율학습 빠지고 집에 가고 싶어하는 녀석들이 늘어날 때마나 공연히 짜증도 많이 냈었지요. 돌아보면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IMF 버금가는 불황의 터널에 꼬박꼬박 월급 받아 챙기는 너희들은 불황이란 걸 아느냐는 친구의 메일이 여운처럼 울리는 연말입니다. 그런 현실은 학교라고 비껴갈 리 없지요. 학비를 못내서 눈총받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현실을 교사라고 해서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 불황의 시기에 배추도 아닌 현금을 차떼기로 삼켜버린 정치인들의 행태가 국민들의 가슴을 짖누르고 있습니다.

모처럼 여유가 생겨 계족산을 올랐습니다. 동강과 서강이 만나 흘러내리는 남한강 줄기에 얼음이 얼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한해의 기억들을 저 강물에 띄워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희망으로 맞이한 새해가 지난해와 다를바 없었다는 기억이 많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버릴 수 없습니다. 올해의 기억을 싣고 흘러내리는 저 남한강의 물줄기가 예전에 흘러내리던 그 물줄기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콩나물밥 이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콩나물밥 이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2. 2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3. 3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4. 4 사진에 담긴 진실...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 끝난다 사진에 담긴 진실...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 끝난다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