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아픔 추스르지 못한 '추모비'

천안초 축구부 희생자 추모비, 유족들 반대 속에 건립

등록 2003.12.31 18:16수정 2004.01.0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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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꿈나무 9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합숙소 화재사고. 사고 발생 8개월 만에 희생자들의 체취가 스며 있는 모교 운동장 한 켠에 추모비가 건립됐다.

그 날의 아픔을 되새기고 재발 방지의 마음을 담아 추모비는 세웠지만 건립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으로 의미는 반감해 반쪽짜리 추모비로 전락했다.

쌈지공원내 추모비 건립

지난 12월 30일 오전 10시 천안초 교정에서는 '축구부 화재사고 희생자 추모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천안초 운동장 남쪽편 담장을 허물고 조성된 쌈지공원의 중앙광장에 세워진 추모비는 너비 260㎝, 높이 310㎝ 규모로 화강석과 오석, 가공자연석으로 만들어졌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 11개는 축구부 11명을, 잔디는 푸른 그라운드를, 9각의 지석과 둘레의 소나무 아홉그루는 희생자 9명을 상징한다. 머릿돌은 축구 꿈나무들이 즐겨 신던 축구화를 형상화했다. 추모비 앞면에는 유족들 가운데 한 명이 쓴 '이별 그리움'이라는 추모시가, 뒷면에는 희생자 9명의 이름과 학년이 나란히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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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30일(화) 건립된 추모비 앞에서 학생대표가 추모시를 낭송하고 있다. ⓒ 윤평호

추모시, '이별 그리움'

슬프고 슬퍼서 비가 내리고
떠나기 싫어 맑은 햇살은
하얀 꽃이 되어 눈부시던 날
너는 하얀 꽃잎이 되어 날아간다

하늘을 가슴에 안고
둥근 달은 마음에 담고
이별은 그리움 바람이 되어
나비가 되어 날아 보지만
텅 빈 가슴에 슬픔뿐

맑은 하늘은 투명해서 볼 수 없고
흐린 하늘은 가슴에 안개꽃 안고
너를 찾는다


추모비 제막식에는 김평산 천안교육장과 허은 천안초 교장, 양기택 충남도교육위원회 의장을 비롯해 교육계와 지역인사 1백여명이 참석했다.

김평산 교육장은 추모사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보낸 3월26일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며 "그날의 통한스런 마음과 사죄의 심정을 담아 추모비를 세운다"고 말했다.

학생 대표로 나선 박옥순(여·6학년)양은 "추모의 동산을 쓰다듬고 가꾸어 너희 모습을 오래 간직할게"하고 약속한 뒤 씩씩했던 친구들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기를 기원했다.

참석자들은 추모비 제막식 뒤 잇따라 헌화와 묵념을 했다. 화재사고로 해체 직전까지 몰렸다가 새 감독과 코치를 위촉해 지난 9월 재건된 축구부 어린이 25명도 추모비를 찾아 엄숙함을 더했다.

추모비 제막식에 유족들 불참

30분 가량의 추모비 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유족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화재사고의 아픔에 고스란히 노출된 유족들이 정작 추모비 제막식에 불참한 것은 추모비 건립 과정에서 빚어진 교육청과의 갈등 탓이다.

천안교육청은 축구부 화재사고 발생 이후 답지된 국민성금 가운데 5600만원을 사용해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를 세우기에 앞서 지난 10월 천안교육청은 학교 관계자와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도 했다.

당초 천안교육청은 추모비 형태로 3가지 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유족들은 추모비에 희생자 9명의 얼굴을 돋울새김으로 넣고 추모비 제막식도 12월이 아닌 겨울방학 개학식이나 졸업식에 맞춰 거행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고 추모식도 지난 12월30일 강행됐다. 화재사고 희생자유족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았던 김창호씨는 "교육청 예산이 아닌 국민 성금으로 추모비를 세우면서 유족들 의견까지 묵살하고 제멋대로 추모비를 세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털어놨다.

유족들은 이번에 건립된 추모비와는 별도로 자체 추모비를 제작해 내년에 세우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악몽같은 화재가 발생한 2003년이 저물기 전 추모비는 세워졌지만 아픔과 갈등은 현재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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