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바보네 가게'로만 손님들이 몰렸을까?

애착이 가는 작고 문인의 수필집과 육필 서신

등록 2003.12.31 21:34수정 2004.01.0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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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본다. 날로 늘어만 가는 이것들을 나는 왜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집사람은 이런 불평을 자주 한다.

"우리 집은 온통 책 때문에 문제야. 거치적거리는 게 책이라 아무리 치워도 소용이 없어"


집사람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책이 귀했던 시절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책을 함부로 넘어 다니는 것조차 못하도록 엄격히 훈계했고, 책이 손상되지 않게 표지를 두꺼운 종이로 싸야하는 것 정도는 기본으로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책이란 혼자 읽고 골방에 처박아 놓는 물건이 아니었다. 사랑방 선반에 올려놓고 동네 마을꾼이며,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읽히게 하는 공유물이었다.

그런데 요즘 내게는 이런 저런 문학 단체와 전국의 지인들이 부쳐오는 다양한 형태의 저서며, 정기 간행물이 다 읽어내기가 힘들 정도로 쌓인다. 그러니 거치적거린다는 집사람의 잔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많은 책이 집안 구석구석 쌓여도 어느 것 하나 귀찮아 해 본 적은 없다.

일찍이 필자도 책을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있거니와,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저자의 공력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을까 생각하면 함부로 취급하기 어렵고, 숫제'신성한 물건'으로까지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소중한 책들을 다 소개하기는 어렵고, 오늘은 수필가 박연구 선생님이 생시에 내게 정성껏 보내 준 저서와 육필사인을 소개하고 싶다.


'수필가 박연구' 라고 하면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평생 수필에만 인생을 걸고 살아 온 특별한 이력의 문필가다. 이분의 수필 <외가 만들기>는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을 만큼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사랑을 받은 바 있고, 수필 <바보네 가게>는 이 분의 대표작이라 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우리집 근처에는 식료품 가게가 세 군데 있다. 그런데, 유독 '바보네 가게'로만 손님이 몰렸다. '바보네 가게'---어쩐지 이름이 좋았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쌀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깍정이 같은 인상이 없기 때문에, 똑같은 값을 주고 샀을지라도 싸게 산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수필《바보네 가게》 앞 부분이다.

그런데, 이분은 글 쓰기 못지 않게 인품도 넉넉하여 각처의 문인들과 남다른 교분을 쌓았고, 글을 쓰는 일에 관한 한 세심한 배려와 자상한 인정을 베풀어 고인이 된 후에도 그리워하면서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 분이 생전에 내게 손수 보내준 서신이 여러 통이 있고, 선물로 보내준 책도 서너 권 있는데, 그 책의 앞머리에 흘려 쓴 사인 형식의 육필 서명이 무엇보다 귀하게 느껴진다.

사인의 형식은 이렇다. 받는 이의 이름을 앞에 적고 그 뒤에 꼭 '大雅 惠存'이라 적었다. 1993년 선물로 보내준 문고본 수필집 《바보네 가게》도 그렇고, 그 분이 생전에 출판사 일을 보면서 특별히 자료를 발굴하여 새롭게 편집한 이태준의 《무서록》첫 장에도 그런 친필사인이 들어있다.

a 매원 박연구 수필가가 사인해서 보내준 책

매원 박연구 수필가가 사인해서 보내준 책 ⓒ 윤승원

이어서 이듬해인 1994년에 선물 받은 자전적 에세이《수필과 인생》의 첫 머리에도 예외 없이 그런 형태의 사인이 들어 있다.

사인 뿐 아니라 책 속에 끼어 있는 '원고지 편지'에는 저자 특유의 겸손과 다정다감이 배어 있어 선비 스타일의 격조와 더불어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풍요롭게 살다간 한 문필가의 인간적인 풍모까지 느끼게 된다.


『윤승원 大雅.
貴書 《삶을 가슴으로 느끼며》는 누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두 번이나 독촉을 해도 안 가져 오는군요. 그런데, 잡지사 편집부로 온 그 책에는 '아무개 혜존'이라고 사인이 안 된 책이니, 이왕이면 '아무개에게 주는 것'으로 한 권 더 보내 주실 수 없겠는지요? '어떤 선물', '두 아들', '혜존', '만원버스에서' 등은 읽어보고 공감을 한 바 있습니다. 그 중 '어떤 선물', '편지를 쓰는 마음'은 '한국일보 문화센터'에서 읽어주며 수필은 이렇게 '삶을 가슴으로 느끼며' 써야 한다고 일러 준 바도 있습니다. 제가 재직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낸 잡지《책과 인생》보냅니다. 저도 글을 생활 주변에서 소재를 구해서 쓰고 있습니다. 졸저 소책자《바보네 가게》보냅니다. 건필을 빌면서...』


매원 박연구 선생님이 보내주신 편지의 한 구절이다. 작품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사인된 책'을 한 권 더 보내달라는 남다른 애정 표시도 잊지 않는다. 거기에는 특유의 따스함이 묻어난다.

그 행간에서 자상한 수필가의 인품도 읽게 된다. 어디 나뿐이랴. 수필 쓰기를 즐겨하는 전국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보여주는 그 분만의 섬세한 삶의 방식이다. 그러기에 진웅기 수필가는 <박연구 論>에서 '추운 현실에서의 따사로운 긍정' 이란 제목의 '작품세계'를 쓰지 않았나 싶다.

a 책갈피에 끼어 있는 저자의 육필서신

책갈피에 끼어 있는 저자의 육필서신 ⓒ 윤승원

이렇게 저자의 품위와 온화한 체취가 스며있는 책들을 어찌 함부로 다룰 것이며, 세월이 지나 이제 그가 고인이 되었다고 책장 밖으로 함부로 밀어 낼 것인가.

휴일에 이런 귀한 책들을 다시금 펼쳐보면, 처음 내가 읽을 때 밑줄 쳐 놓았던 문장의 구절이 유난히 눈에 크게 들어온다.

책 읽는 사람의 습관이요, 굳어진 버릇이긴 하지만 이렇게 밑줄을 그으면서 읽은 책은 그 책을 선물로 준 분의 고마운 뜻과 정성 못지 않게 독자로서 웬만큼 꼼꼼히 읽었구나 싶어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밑 줄 그으며 가슴으로 느꼈던 잔잔한 감동의 순간들이 다시금 새롭게 느껴져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책 선물은 그러기에 단순히 물건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영혼의 교감(交感)이다. 매원(梅園)선생이 저 높은 세상에서 생시 모습 그대로 조금은 부끄러운 듯, 당신이 보내준 책을 새롭게 펼쳐 보는 이 독자에게 그윽한 미소를 보내 줄 것 것만 같다.


* 매원 박연구(朴演求,1934-2003)
수필가이자 계간 '에세이문학' 발행인. 1963년 월간 신세계 신인작품 수필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으며, 월간 '수필문학' 주간, 한국문인협회 이사, 계간 '한국수필' 편집인, 도서출판 범우사 편집위원을 거쳐 1999년부터 계간 '에세이문학' 발행인으로 활동해 왔다. 대표작 ‘바보네 가게’(1973년)를 비롯해 ‘어항 속의 도시’,‘햇볕이 그리운 계절’,‘사랑의 발견’,‘환상의 끝’,‘속담 에세이’, ‘매원수필’,‘얘깃거리가 있는 인생을 위하여’등의 수필집을 남겼다. 평생토록 수필만을 써 수필의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수필문학상(1987), 한국수필문학상(1990), 한국문학상 수필부문(2001)을 수상. 2003년 3월 7일 타계

바보네 가게

박연구 지음,
범우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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