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정'의 새날 새아침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잠시 평화롭게 쉴 자격이 있는 당신

등록 2004.01.01 04:09수정 2004.01.0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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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오정이다. 쥐띠니까 올해 마흔 다섯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회사를 그만 두었으니까 요즘 시쳇말로 사십오세 정년이라는 '사오정'이 바로 나인 것이다

IMF보다 어려웠다던 2003년. 명퇴가 유행처럼 번지는 사회 현실을 반영하여 '사오정'으로 시작했던 유행어가 삽십팔세에도 퇴직한다는 '삼팔선'이라는 말로 삼십대까지 위기감을 자극하더니 급기야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까지 생겨나 지금의 경제 현실이 얼마나 혹독하게 어려운가를 반증하는 잣대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

내가 다녔던 회사도 지난해 대대적인 명예퇴직을 시켰다. 대상은 물론 과장급 이상이었고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될 것이라는 숱한 소문 끝에 많은 동료들이 직장을 떠나갔다. 거의 대부분 사십대였다.

난 사표를 썼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려 나가는데 스스로 사표를 쓰다니 웬일이냐"는 사람들과 "경제현실이 최악이니 따박따박 월급 주는 직장 고맙다 생각하고 당분간 가만 있으라"는 주변의 만류를 무시(?)하고 용감하게 스스로 사직서를 낸 것이다. 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직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주변의 만류는 내게 아무런 제어가 되지 못했다.

그룹 내 이동을 한 번 하기는 했어도 난 이십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같은 기업을 다녔다. 이십대의 젊음을 지나 삼십대는 정말 화살촉같이 지나가 버려 어느 날 불쑥 사삽대의 중년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시간이 빨리도 흘러버렸다. 명문대를 나오지도 못했고, 그흔한 빽도 없는 보통의 직장여성이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사력을 다해 일을 했다고 자부했으나 난 제때 승진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여성에 대한 제도와 법은 참으로 많은 변화와 개선이 있었다. 하지만 남성들이 주도하는 이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관념'은 법과 제도의 개선만큼의 변화 속도를 따라주질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여성은 21세기를 살아가는데 남성은 19세기를 살고 있다'는 말을 내가 30대 때 들은 적이 있는데, 여성과 남성이 갖는 관념의 괴리가 얼마나 큰가를 단편적으로 증명해 주는 얘기가 아닌 가 싶다. 여성장관이 4명이나 탄생한 지금이라고 해서 사회 전반에 걸친 여성에 대한 관념이 바뀐 것이라고 해석될 수 는 없을 것 같다. 능력 부족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난 그 관념의 벽을 결국 넘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열심히 놀고도 제때 승진하는 요령있는 주변의 일부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때는 절망도 했었다. 회사에서 나처럼 일만 죽도록 열심히 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었을 정도였다.

건강 상태가 최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직장에서의 나의 앞날이란 것이 뻔히 보이는 듯 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노후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어 나 스스로 사오정이 되는 것을 자청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어쩌면 100살을 넘게 살지도 모르는 불행한 세대가 될 것이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까지 자칫 얼마간의 직장생활을 끝으로 죽기 전까지 수십년의 백수 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난 직장이 아니라 직업이 필요했다. 적어도 60살이나 70살까지 내 의지대로 일 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살벌하게 어렵다는 지금 내가 호기롭게 사표를 쓸 수 있었던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너무나 지치고 힘겹던 시절 '평화와 행복'이 너무도 간절하여 이를 내 인생의 화두로 삼았었다. 난 그것을 위해 어떤 때는 채우고 또 어떤 때는 버릴 것이다.

난 백수로 보냈던 지난 한 달이 너무나 행복했다. 늦잠도 자고 화초에 물도 주고 한가롭게 집안도 깨끗하게 청소도 한다. 치매로 아이가 되어 버린 나의 엄마와도 하루종일 함께 있어 많은 얘기도 하고, 강이 보이는 커피샵에 차를 마시러 가기도 하고, 산책도 하여 엄마의 정서적인 안정도 되찾아 주는 기쁨도 느끼고 있다.

참으로 긴 시간을 앞만 보고 달려왔다. 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달리려 한다. 나 역시 '소녀가장'이니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을 리 없겠지만 백수가 된 지금에서야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평화로움과 행복을 느끼고 있으니 어쩌면 난 영원한 백수 체질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 염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이나 염려 따위로 지금의 평화로움과 한가함을 망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금 난 행복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의든 타의든 사오정이 된 백수 동기들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십년 또는 이십년이상 직장생활을 하며 앞만 보고 힘겹게 달려 왔던 그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잠시 평화롭게 쉬어도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노라고 - 지금의 변화된 현실은 다른 무엇을 시도할 수 있는 분명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임을 절대 의심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

새해이다. 새아침이다.

난 내 인생의 후반을 어떻게 꾸밀 것인지 이런 저런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다. 2004년 갑신년은 내 인생에서 분명 의미있는 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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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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