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분쟁현장 뛰어드는 '불나방'

프리랜서PD 강경란씨 취재기

등록 2004.01.02 11:26수정 2004.01.0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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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강경란 PD. 강 PD 는 분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곳이면 세계 어디든 달려가 카메라에 담고 있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강경란 PD. 강 PD 는 분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곳이면 세계 어디든 달려가 카메라에 담고 있다. ⓒ 우먼타임스

사람 사는 곳에는 늘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세계는 지금 이 시각에도 각종 분쟁과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다. 강경란(43)씨는 동아시아, 중동,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피 흘리고 있는 세계 곳곳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취재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프리랜서 PD다. 온몸으로 얻어낸 그의 체험을 통해 세계 여성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강 PD는 15년간 분쟁지역을 취재했다.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터지면 곧바로 그곳으로 갔다.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소말리아, 알바니아, 코소보 등 수많은 나라에 뛰어들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분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곳에서 강 PD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남성들이 만들어낸 ‘힘의 논리’에 의해 불거진 분쟁과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노약자와 여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선 강 PD는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다. 미얀마의 반독재시위를 이끌어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아웅산 수지, ‘피플파워’로 집권한 필리핀의 두 번째 여성대통령 아로요, 현 인도네시아 대통령 메가와티 등 동남아시아의 여성지도자들을 만났다. 분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국민들을 평화로 이끌어줄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여성지도자들은 대부분 부모 잘 만난 덕에 지도자가 되었죠. 각각의 인상과 매력은 다르지만,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안목과 덕목은 분명히 있어요. 우리가 배워 익힐 수 있는 롤 모델로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강 PD는 200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란의 법률가 시린 에바디도 만났다. 이란 최초이자 마지막 판사 출신인 에바디는 극도의 가부장적 이슬람문화 속에서 여성을 위한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변호사다. 이란 여성의 결혼과 이혼 문제, 양육권 등 차별법안을 개혁하는 성과를 일궈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 점은 강 PD도 인정했다. 하지만 강 PD는 조금 다른 생각도 갖고 있었다.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권교체가 가능한 나라는 이란밖에 없어요. 이란은 지금 보수와 개혁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어요. 에바디는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법률가죠. 덜 투쟁적이고, 덜 민중적인 에바디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미국과 유럽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봅니다."

“힘은 아래로부터 나온다” 체득


강 PD는 여성지도자들에게 결여된 ‘투쟁정신’을 NGO활동가와 언론인에게서 본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여성의 몸으로 전쟁의 포화에 뛰어들어 일약 ‘스타’가 된 크리스티안 아만포 CNN 국제부장,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베들레헴 예수 탄생 교회를 점거하고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이자 목숨을 걸고 합류해 함께 투쟁한 케롤라인 콜 LA타임스 기자 등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평화를 실천하는 진정한 ‘해결사’였다.

강 PD는 “힘은 위가 아닌 아래로부터 나온다”고 믿는다. 또한, 그 힘이 역사를 이끌어간다고 믿는다. 그것은 강 PD가 15년간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체득한 신념이다. 정치인은 늘 “국민의 이름으로”라고 말한다. 하지만 국민은 자신들의 이름을 팔지 않는다. 분쟁과 전쟁 속에서도 그저 ‘인간’으로서 살아갈 뿐이다.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 어린이들이 온몸에 폭탄을 묶고 탱크에 뛰어들어 자폭하고 있어요. 그 아이들의 눈에는 증오만 있어요. 그 증오의 눈빛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지를 느껴요. 놀러 갔다 늦게 귀가하는 아이들을 기다리듯이 분쟁지역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기다려요.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죽은 거죠. 시신도 찾을 수 없을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아이들을 많이 낳아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많이 낳는 거죠.

분쟁과 전쟁 속에서의 양육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40대 여성도 60대처럼 보여요. 그래도 그들은 살아요. 화살을 돌릴 만한 인물이 분명히 있는데, 그냥 살아요. 순박하게 살아요. 그 모습에서 이념과 종교 등의 거창한 사상을 뛰어넘는 ‘진리’를 발견하게 돼요.”

고상한 이념은 언제나 있었다. 누구나 평화와 평등이라는 말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늘 세상 곳곳은 분쟁과 전쟁으로 앓고 있다. 그 아픔을 어금니를 깨물며 참아내고 있는 노약자와 여성, 사회적 약자들을 강 PD는 본다. 그렇게 많은 작은 개인, 보잘것없는 개인 하나 하나가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아가는 과정이 지구촌의 역사를 써 가는 ‘붓’이라고 강 PD는 믿는다. 그 ‘붓끝’이 써낸 글자가 ‘평화’와 ‘평등’일 것이라고 또한 믿는다.

강경란이 본 분쟁지역 여걸들

'민주화의 불씨'…밑바닥도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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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 아웅산 수지 : 미얀마의 정치가. 1988년 4월 반독재시위를 이끌었지만 내란선동 혐의로 자택연금을 당함.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 1995년 7월 자택연금에서 해제. 미얀마의 정신적인 지주.


→'윗사람'이다. 아버지 잘 만나서 정치를 한 사람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밑바닥을 모른다. 하지만 민주화의 상징이다. 민주화의 불을 태운 ‘불씨’다. 미얀마는 몰라도 아웅산 수지는 안다. 인간적인 매력도 있다. 외모가 아름답지 않은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은 내놓을 줄 안다. 자택연금 등의 억압과 통제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거리’로 나와 국민들을 이끌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작은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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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 아로요 : 필리핀의 정치인. 1998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후 경제적 업적을 쌓아 ‘경제대통령’으로 불림. 2000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뇌물수수 사건이 터지자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민항쟁 합류. 2001년 1월 20일 대통령의 권좌에 오름.


→참 작다. 키도 몸집도 정말 작다. 머리띠도 잘 두른다. 초등학생 같은 모습이다. 정말 저런 여자가 어떻게 정치를 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의외로 당차다. 정치에 있어서 상식과 원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때로는 상식을 무시할 수 있는 힘도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남이야 뭐라든 내 갈 길 간다”는 식의 용기와 힘이 있다. 그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지도자도 드물다.

능력도 매력도 없는 최악 여성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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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 메가와티 :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맏딸. 1999년 30년 독재를 휘둘렀던 수하르토가 몰락하자 부통령으로 당선. 와히드 대통령이 부정부패를 저질러 탄핵되어 2001년 7월부터 대통령 역할 수행중.


→ 수없이 많이 만난 세계 여성인물 중에 최악이다. 대통령으로서 뚜렷한 정책도 없고 비전도 없다. 여성지도자로서의 온갖 나쁜 이미지를 모두 모아놓은 인물로 느껴졌다. 매력도 뭣도 없는 아줌마라고 할까. 부모 잘 만난 덕에 대통령까지 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 역사의 발전 관점에서 볼 때 부정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정보 접근방법·해석능력 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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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 크리스티안 아만포 : CNN 국제부장. 1991년 걸프전 당시 현장생중계를 한 CNN의 간판스타. 전쟁의 포화를 뒤로하고 전황을 소개해 세계적인 언론인 대열에 오름. 그 후에도 세계의 분쟁지역을 발빠르게 취재해 전 세계 언론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음.


→ 웬만한 나라에서는 대통령 이상의 대접을 받는 ‘VIP언론인’이다. 취재 해당 국가의 대통령이 벌벌 길 정도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질투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자질과 덕목이 있는 언론인이다. 정보에 접근하는 방법과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선 굵은 취재를 할 줄 안다. 역경을 뚫고 들어가는 추진력이 대단해 여성언론인의 롤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합리성 추구…분쟁엔 몸사리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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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 시린 에바디 : 이란 법률가. 이란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여성판사.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이슬람 문화가 깊게 배어 있는 차별적인 법 조항 개혁을 위해 힘써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


→ 노벨상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그가 법률가로서 차별적인 법안을 개정하는 등 노력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웬만한 법률가들이 할 만한 일을 했을 뿐이다. 보수와 개혁의 분쟁 속에서 그는 몸을 사리는 편이다. 합리성이 그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단계적 개혁을 꾀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좀더 그가 투쟁적이길 바란다. 이란 여성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

“불나방같은 삶...피흘리는 그곳이 나를 빨아들여”
15년간 분쟁현장 취재해온 강경란씨

강경란 PD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80학번이다. 불행한 학번이었다. 군사독재시대와 맞서 싸우는 것에 청춘을 바쳐야 했다. 수많은 사회학 이론과 이념을 배웠다. 문득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허상이 아닌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배웠다.

“대학 졸업 후 NGO단체에서 활동했어요. 그러다가 1988년 ‘그냥 이끌려서’ 분쟁지역으로 뛰어들었어요. 한 번 떠나면 서너 달은 보통이고, 목숨도 간당간당하죠. 물론, 돈도 잘 못 벌고(웃음). 그래도 그 사람들에게서 제가 책에서 배웠던 이론과 이념을 배워요. 그것을 능가하는 ‘사람의 힘’을 배워요.”

그는 자신처럼 분쟁과 전쟁지역을 취재하는 언론인들을 ‘불나방’ 같다고 말한다. 전쟁이 터진 나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별 궁리를 다하니까. 그곳에 무엇이 있다고 들어가려 하나. 정말이지 왜 이렇게 살까. 그래도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우리를 빨아들이는 ‘불’이 있으니까요. 피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으니까요.”

현장에선 누구나 평등

그래서 그는 총탄과 포화 속으로 뛰어든다. 분쟁·전쟁지역에서는 위아래가 없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없다. 그 어떤 나라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자라는 직함도 필요 없다. 더 뛰고, 더 열정적인 사람이 최고일 뿐이다. 현장에선 평등한 것이다.

“세계의 유명한 언론인들과 많이 친하죠. 서너 달을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데 그럴 수밖에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요. 몸으로 느끼고 배운 정보력과 해석력이 대단해요.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대접을 받아요. 그들의 활동이 바로 ‘국력’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아니죠. 그게 안타까워요.”

그는 가까운 일본만 해도 국제적인 인식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전쟁터로 배낭여행을 가는 ‘또라이’들의 무모한 정신이 바로 그들의 국력이라고 믿는다. 자기 나라의 이익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글로벌시대의 ‘세계인’이 갖춰야 할 소양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와 무대를 뛰어다닐 인재를 길러야 해요. 우린,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예요. 구석에 콕 박혀 아옹다옹하지 말고, 넓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안목을 키우고 예측력을 늘려야 해요. 그것이 세계의 흐름이에요.”

국제무대 누빌 인재 길러야

하지만 그는 혼자다. 선배도, 후배도 없다. 오직 혼자다. 후배를 키우고 싶은데 키울 수가 없다. 시장이 작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분쟁지역을 찍어 와도 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후배와 함께 분쟁과 전쟁으로 찌든 얼룩을 지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나라도 ‘국익’을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게 아닐까.

내 것만 보지 않고, 남의 것을 함께 보고, 그것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고쳐 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강 PD는 지금도 세계 곳곳을 맨몸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 우먼타임스 최희영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성종합신문 <우먼타임스>에서 제공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성종합신문 <우먼타임스>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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