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지나가는 것이 가장 무서웠어"

오늘은 할머니 제사날입니다

등록 2004.01.07 09:42수정 2004.01.0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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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할머니 제사날입니다.
오늘은 할머니 제사날입니다.이종원
오늘 할머니 제사랍니다. 제 아들 성수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되겠지요. 할머니는 장손인 저를 무척이나 예뻐하셨습니다. 가끔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풀빵을 사주시곤 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어떻게 돈을 모으셨는지 양복점으로 저를 데려 갔습니다. 제가 양복을 걸친 모습을 보고 얼마나 대견스럽게 생각하시든지….


할머니는 30대 초반에 홀로 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큰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3남 1녀를 혼자 키우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억척대장이고, 또순이랍니다. 농사 지을 땅도 없고, 가진 것도 하나도 없어 시골 장터마다 돌아다니며 옷 장사를 하셨답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그 무거운 옷을 풀고 다시 싸고…. 다음날 다른 장터로 옮기고….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희망을 잃기 않고 열심히 사셨습니다. 어려운 환경임에도 자식들 대학공부까지 시켰답니다.

시골의 어느 장터였습니다. 삶이 피곤하게 보이는 아주머니가 이 옷 저 옷 만지작거리는 겁니다. 한눈에 봐도 옷을 살 돈이 없어 보입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 몰래 그 아주머니 시장바구니에 속옷을 넣어 주는 것을 보았답니다. 당시에는 못 느꼈는데, 오늘날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할머니는 참 멋진 분이셨어요. 과연 저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부산에 살았습니다. 충북 괴산 할머니댁에 놀러갔다가 할머니와 함께 부산에 가게 되었습니다. 조치원에서 무궁화호나 통일호를 타면 금방 부산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할머니는 굳이 비둘기호를 타는 겁니다. 기차 삯이 싸다는 이유로 조치원 역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마냥 기다렸습니다. 부산까지는 거의 12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기차는 조그만 역에도 다 멈춥니다. 어떤 역은 20분도 넘게 정차합니다.

암만 생각해도 이해를 못하겠어요. 기차 삯보다 밥값이 더 들텐데…. 그러나 당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6시간이나 12시간이나 조금 참으면 되잖아. 대신 그 시간동안만은 배가 부르잖아."

얼마나 배고픈 삶을 겪었으면 이런 말씀하시겠어요.


언젠가 할머니한테 들었습니다. 시골 마을에 외상 수금하러 갔다고 합니다. 부모는 밭일 나가고 아이들만 놀고 있길래 마냥 기다리다가 과자만 사주고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버스를 놓쳐서 20리길을 걸어 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섭고 힘드셨겠어요?

여자 혼자서 갓난아기를 업고 산길을 넘어왔으니…. 무덤을 지나가는 것이 가장 무서웠노라고 합니다. 묵주를 꼭 쥐고 기도하면서 산을 넘어왔다고 들었습니다.

언젠가 할머니 외상 장부를 보게 되었어요. 수십 개의 작은 공책에 깨알같이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10년도 넘게 돈을 못 받은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그래도 돈 없다고 하면 처진 어깨를 하고 되돌아온답니다.

'물갯마을 김아무개 쓰봉 4천원'

참! 제가 대학 다닐 때 담배 피우다 할머니께 들켜서 빗자루로 사정없이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할머니가 밉고 야속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당시 할머니가 때렸던 매의 의미를 알게 되었답니다. 당신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가요.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를 뵈러 시골로 갔습니다. 그때는 이미 치매가 심해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나봐요. 말씀은 못하시고 제 손을 꼬-옥 잡는 겁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글썽글썽.

방에는 똥 오줌냄새 때문에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는 제게 무엇인가 간절히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을 텐데…. 저는 냄새를 참지 못하고 나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달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할머니와 더 있었어야 했는데….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세요.

끔찍이 아꼈던 장손자인 저도 내년이면 마흔 줄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계셨으면 너무나 사랑스러워할 증손자인 성수도 할머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쁘게 자란 제 아이들입니다.
예쁘게 자란 제 아이들입니다.이종원
당신은 가셨지만 우리들에게 신앙을 주셨고,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라는 사랑을 가르쳐 주셨고, 아무리 힘든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도 주셨습니다.

오늘따라 할머니의 따뜻한 품안이 간절하게 생각납니다.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할머니.

덧붙이는 글 | 이종원 기자의 홈페이지:http://cafe.daum.net/monol4

덧붙이는 글 이종원 기자의 홈페이지:http://cafe.daum.net/mono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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