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별꽃무늬 담장김정봉
낙산사는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창건 설화와 관련하여 의상과 원효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동해 변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의상이 찾아와 기도 끝에 관음을 만나 이 곳에 절을 지은 반면 그 뒤를 이어 찾아든 원효는 관음보살을 만나기는커녕 봉변만 당한다.
신라 불교의 쌍벽을 이루고 있던 의상과 원효, 왜 그들의 능력은 차이가 나는 것으로 그려졌을까? 의상은 진골 출신이었고 원효는 육두품출신인데다 의상은 엄격성, 규범성을 강조하며 호국신앙을 내세운 반면 원효는 민중과 함께 하며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자율성을 강조하였다.
통일 전쟁을 치르고 난 신라는 새로운 국가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었고 그에 맞는 사상은 원효의 것보다는 의상의 것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의상의 '코드'가 더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의상보다 중생과 함께 하는 원효의 이념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그래서 낙산사의 설화에서 무리를 해가며 원효는 '엉뚱한' 행동을 하는 중으로 의상은 법력이 뛰어난 '반듯한' 승려로 그리고 있다.
낙산사의 창건설화가 대중의 코드에 반하여 정치적으로 이루어졌던 아니던 한번 머릿속에 박힌 생각은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바뀌지 않고 남아있다.
낙산사 담을 에워싸고 심어져 있는 대나무와 이름으로나마 의상의 숨결이 느껴지는 의상대 그리고 그 북쪽 밑으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바닷가 석굴 위에 지어진 홍련암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