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갈이, 그것은 역사의 대세이다

[정대화 교수 기고] 정치권은 낙선운동 '불법'운운 자격 없어

등록 2004.01.09 15:07수정 2004.01.11 22:55
0
원고료로 응원
오늘 아침 일어나 책상 앞에서 조용히 ‘정치’를 생각해본다.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란 과연 무엇이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게 되고, 신문의 가장 많은 지면과 방송의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으로 바뀌지 않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30년 가까이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책을 끼고 다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고 착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돌이켜 보건대 제대로 된 정치를 위해 수백 수천년을 싸워온 것이 우리 나라를 비롯한 모든 나라 모든 국민들 공통의 고통스런 경험이었는데, 단지 짧은 몇 년간의 고민 때문에 자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정치개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정치개혁이란 무엇일까? 매우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요약하자면 다섯 가지 정도가 아닐까 한다.

모든 국민들에게 활짝 열린 개방된 정치, 모든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참여정치, 정치의 모든 내용과 절차가 낱낱이 공개되는 투명한 정치, 모든 국민들에게 이익이 균등하게 돌아가는 균형잡힌 정치, 최대한의 헌법원리를 구현하면서 적어도 최소한의 도덕률은 지키는 정치 등등. 여기에 정치를 담당하는 집단, 즉 국회와 정당과 국회의원들의 적절한 헌신성과 효율성만 덧붙인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이런 저런 발상을 하면서 다시 정치의 주인이 누구일까 생각해본다. 봉건제 아래서는 왕이 정치의 주인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기에 “짐이 곧 국가” 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민은 없었고 단지 신민에 해당하는 백성만 있었다.

그렇다면 왕도 없고 신민도 없는 오늘날의 현대민주주의에서는 누가 주인일까? 정말로 국민이 정치의 주인일까? 헌법상 그렇기는 하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1조 제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못박아 놓았다. 그러나 두 가지 의문이 뒤따른다.

@ADTOP@
하나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말과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참뜻, 즉 주권재민과 국민권력의 진정성에 관한 것이다. 국민은 얼마만큼의 주권자인가? 권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국민은 얼마나 주체적이며 실제로 어느 정도의 힘을 행사하는가? 그러나 현실에서 국민이 스스로를 주권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더구나 자신이 스스로 권력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더욱 소수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권의 불순한 태도에 관한 것이다. 정치학 이론에 따르자면 정치의 주체는 국민이고, 헌법이론에 따르더라도 권력의 주체는 국민이다. 그렇다면 정치권과 정치가들은 국민정치의 대리인, 그것도 헌법과 법률이 정한 기간 동안 정치를 담당하는 한시적인 대리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들이 정치의 주체인양 과욕을 부리고, 주권자인 국민을 깔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를 들어보자.

정치개혁이나 시민의 정치참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정치권에서 하는 말이 있다. 정치는 정치권에 맡기고 시민운동은 감시나 잘 하라든지 국민들은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라고 말한다. 참으로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불손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정치의 주인인 국민을 정치로부터 밀어내겠다는 것이며, 주권재민의 헌법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며, 썩은 정치권이 정치를 독점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오만한 발상이 결국 지난 대선에서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을 가능하게 했다. 깊은 밤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검은 돈을 주고받는 것은 국제범죄조직을 다룬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장면인데, 이런 범죄적 발상이 가능한 것은 국민을 무시하고 국가를 무시하고 헌법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재벌의 불법 금고를 부정한 방법으로 털어서 불법선거를 자행하고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그 상상력이 파격적이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아마도 이런 발상에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일곱 명의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도 일괄 거부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오만한 정치권을 누가 어떻게 말린단 말인가!


불법 대선자금과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참여정부 아래서 이라크 파병문제나 위도 방폐장 문제가 갈등을 겪는 이유 역시 참여정부가 국민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인수위 시절의 초발심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이 정답인지 바로 나온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투표권을 가진 국민의 뜻이 가장 중요했고, 대통령이 되고 보니 국민의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대단히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정치권이 선거가 가까워지고 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니까 낙선운동이 어떻네 당선운동이 어떻네 시비를 한다. 먼저, 정치권에 꼭 하고 싶은 말은 국민들이 낙선운동을 하든 당선운동을 하든 시비하지 말고 당신네 정당이나 잘 꾸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영어로 말하면 “it's none of your business!" 라고 표현되는 모양인데 국민들이 하라고 맡겨놓은 정치개혁과 예산안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주제에 주권자인 국민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려 들다니 그 소행이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더구나 불법 대선자금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이 시민단체에 대해 ‘불법 낙선운동’ 운운하는 것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재벌로부터 500억원 이상의 불법 대선자금을 받아 불법선거를 치른 한나라당이 어떻게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공익적인 낙선운동에 불법 시비를 하려드는지 그 인면수심의 만용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낙선운동은 2000년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민운동으로 평가받았으며 이웃의 여러 나라로 수출까지 된 우리의 우수한 시민적 상품이다. 그러니 정상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낯뜨거워서라도 불법 시비를 자제할 것이다.

다시 정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가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에서이다. 한 때 정치권이 국민을 무시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무시당하라는 법은 없다. 과거 불법이 있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국민들이 불법을 용인할 것으로 예상하지 말자.

지금의 국민은 그때의 국민이 아니다. 과거 한 때 국민들이 정치의 원리를 몰랐거나 정치가들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혹은 일상의 생업에 바빠 주인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정치가 엉망이 되었다면, 이제 주권자인 국민이 주인된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면 된다.

영국의 액튼 경이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고 했는데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는 말을 격언으로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정치와 권력이란 달리는 자전거와 같아서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가 넘어지듯 감시하지 않으면 정치부패와 권력남용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4년마다 실시되는 선거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고안된 국민적 감시체계라고 보면 된다. 이때 국민들이 어떻게 감시할 것이냐 문제는 국민들이 선택할 문제이지 국민의 정치적 머슴에 불과한 정치인들이 왈가불가할 일이 아니다.

새해가 밝았고 다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저 낡고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를 일거에 깨끗이 물갈이할 기회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비록 지금의 우리 정치는 저질의 블랙코미디 수준임에 틀림없지만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들 때문에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국민들 때문에 개선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썩어빠진 정치가들이 문제라면 물갈이하면 되고, 낡은 정치권이 문제라면 정치권 자체를 개혁하면 된다. 처음에는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정치권과 정치가들에게 변화를 요구해야겠지만, 정치권이 주권자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굳이 요구할 이유가 없다.

2004년 4월 15일에 치를 국회의원선거란 주권자인 국민과 정치적 대리인을 자청하는 후보들 사이에서 정치적 계약관계를 체결하는 과정이다. 대리인이 되겠다는 사람들을 민주적으로 선별하기 위해 선거를 치르는 것일 뿐이다.

a 정대화 교수

정대화 교수

2000년 총선을 치른 후 4년의 계약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재계약을 하려는 것인데, 계약사항을 이행하지 못한 대리인과는 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되고, 국민과의 계약사항을 이행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은 배제하고 성실한 일꾼을 선별하면 되는 것이다.

정치개혁과 물갈이를 위한 결전의 새날, 우리 모든 국민들이 주인된 마음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2004년의 화두인 물갈이에 당당하게 참여하자. 그리하여 국민을 속이는 부패정치와 지역주의정치를 일거에 날려버리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2. 2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3. 3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4. 4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5. 5 윤석열 정부, 1차 독재 징후가 보인다 윤석열 정부, 1차 독재 징후가 보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