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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에는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곳이야 워낙에 따뜻한 지방이라 겨울이라 해도 못 견디게 추운 날은 드문 편이지만 올해는 그 정도가 심합니다. 물론 노숙자들이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겨울이 따뜻하다는 것은 크나 큰 복이지요. 나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김 등의 겨울 해초를 기르는 양식 어민들에게 따뜻한 날씨는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하니 따뜻한 날씨를 마냥 즐거워 할 수 없겠지요. 지나치게 따뜻한 겨울은 나에게도 작은 걱정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싱겁게 저려서 담근 김장 김치가 너무 빨리 익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다른 해에는 김장 김치가 쉽게 시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좀 짜다 싶을 정도로 간을 했었습니다. 이곳은 대부분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여름철까지 두고 두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묵은 지'라고 하는데, 한번이라도 먹어본 사람은 젓갈과 함께 발효된 묵은 지의 깊은 맛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하지만 두고 두고 오래 먹기 위해 너무 짜게 간을 하다보면 아예 발효를 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저려지고 마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나 또한 김장 경력이 일천하다 보니 번번히 그랬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다른 해보다 싱겁게 간을 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김치가 삼삼하여 지금 먹기에는 적당합니다. 하지만 여름까지 그대로 두었다가는 시어 꼬부라져서 못 먹게 될 것이 뻔하겠지요. 어쩌지, 어쩌지,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오늘 아침에는 땅을 파고 항아리에 묻어 뒀던 김치들을 꺼냈습니다. 포기마다 하나 하나 굵은 소금을 뿌리고 간을 다시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여쭤봤더니 오래 두고 먹을 것은 독간을 하기도 한다더군요. 어른들께 진작에 물어봤으면 될 것을 모자라는 지혜를 짜내느라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소금간을 한 김장 김치를 땅에 묻고 난 뒤에는 텃밭의 월동 무를 뽑아다 깍두기를 담았습니다. 이곳은 겨울에도 배추나 무, 당근, 상추 등속의 야채들이 노지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더러 눈서리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면 얼기도 하지만 햇볕이 나면 이내 스르르 녹고 다시 생기를 되찾습니다. 볏짚으로 대강 덮어 주기만 하면 지상으로 드러난 무도 좀채로 바람이 들지 않아 봄까지 캐다 먹는데 그 단맛이 배보다 달콤하기도 합니다.
한겨울 텃밭에서 막 뽑아온 무를 숭숭 썰어 담근 깍두기 맛. 이 맛은 도시 사는 사람들이나 북쪽에 사는 사람들을 충분히 약 올릴 만합니다.
나는 유달리 무를 좋아하지요, 생 무나, 무나물, 무생채, 총각 김치, 동치미, 할 것 없이 무로 만든 음식은 무엇이든 나에게는 최고의 별미입니다. 그 중에서 새콤하게 익은 깍두기는 혼자서 몇 사발로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참, 깍두기를 왜 깍두기라 하는지 아세요. 수필가 윤오영 선생님의 '깍두기설'이라는 글에 깍두기의 유래가 나오는데 나는 깍두기를 빌어서 수필 문학을 논한 윤오영 선생님의 본뜻보다 깍두기의 유래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윤 선생님에 따르면 깍두기라는 김치는 조선 정종 때 영명위 홍현주라는 사람의 부인이 창안해 냈다고 합니다. 궁중에 경사가 있어서 종친들의 회식 자리가 있었는데 각 궁에서 한가지씩 일품 요리를 해 올렸다지요. 이때 홍현주의 부인이 만들어 올린 음식이 깍두기였다고 합니다.
먹어 보니 그 맛이 기막혀서 이름을 물어보자 이름이 없다고 했겠지요. 그저 우연히 무를 깍둑깍둑 썰어서 버무려 봤더니 맛이 그럴 듯하기에 이번에는 정성껏 만들어 올렸다고 했겠지요. 그러자 왕이 그러면 깍두기구나 했겠지요. 그렇게 생겨난 음식이 깍두기라고 합니다.
참 재미난 유래지요. 어떻든 갖은 양념에 젓갈을 다려서 넣고 고춧가루로 버무린 겨울 깍두기는 익지 않았어도 그 맛이 일품입니다. 오늘 점심은 아무 다른 반찬 없이 막 버무린 깍두기 한 그릇으로 한사발의 밥을 다 비웠습니다. 따뜻한 남쪽 섬에 살다보니 한 겨울에도 이런 호사를 다 누리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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