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항의집회
열사의 죽음으로부터 6월 항쟁까지
1987년 1월 14일 당시, 경찰은 제헌의회 그룹 사건으로 81학번 박종운을 수배 중이었는데 그의 홍길동 같은 잠행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던 중이었다. 박종운은 일주일 전 종철의 하숙집에 들른 적 있었는데, 이때 종철은 손에 잡히는 대로 목도리와 마지막 남은 비상금까지 털어 그에게 건넸다. 그리하여 박종운을 향하던 화살은 종철에게 꽂히고 말았다.
긴급 연행된 종철이 끌려간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형사들로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종철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박종운의 귀에 들어가면 또 허탕이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지휘하에 조한경, 강진규, 이정호, 황정웅, 반금곤 등은 종철의 옷을 벗기고 물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수 차례 욕조에 머리를 밀어 넣었지만 종철은 묵묵부답으로 버틸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종철의 사지가 뻣뻣해졌다.
처음에 경찰은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엎어졌다”며 후안무치로 일관했으나, 담당의사 오연상씨가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고문 흔적이 있다”고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시급히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여 '박군이 심장마비로 쇼크사한 것으로, 1단 기사 처리'하도록 했다.
분노한 학생들이 2.7, 3.3 투쟁으로 뛰쳐나왔지만 역부족이었고, 전두환 정권은 도리어 현행 대통령 간접선거(소위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라는 초강수로 버티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항쟁 7주년 추모미사를 집전하던 김승훈 신부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된 경관은 모두 다섯 명이며,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하여 국민을 두 번 속였습니다.”
민중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들끓는 여론은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는 6·10 대회 성사를 위한 학생회장들의 단식농성이 줄을 이었다.
그날은 원래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코미디언 김병조의 만담까지 섞어 대회는 일사천리로 끝나고,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의 손을 번쩍 드는 그 순간, 전국에서 25만 명이 항쟁의 거리로 뛰쳐나왔다.
밤늦도록 계속된 시위에서 3800명이 연행되었으나 이제 시위는 명동성당에 갇힌 600명의 농성자들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로부터 6일간,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가 된다. 농성대오에게는 전국에서 후원금과 식료품이 끊임없이 답지했다. 농성 마지막 날,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농성자들은 자발적으로 유서를 쓰며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