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주 할머니는 세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송민성
황금주(85) 할머니의 수요일 아침은 일찍부터 부산하다. 정오에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여하려면 적어도 아홉 시까지는 집을 나서야하기 때문이다.
"비 많이 오고 몸 아프면 나도 안 나가. 그렇지 않으면 나가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 할머니가 수요집회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황 할머니는 자신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와 투쟁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억울한 속내를 달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그는 알고 있었다.
2년 지나면 놓아 주겠다고 속여
황금주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1941년. 그가 겨우 스무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내가 안 가면 식량이고 고무신이고 배급을 주지 않는 걸. 안 가고 배겨. 그때 나를 데리고 가면서 일본인들이 그랬다고, 돈 많이 벌게 해 주고 2년 지나면 이 자리에 그대로 돌려 놓겠다고. 한마디로 처녀공출 당해 나간 거야."
▲황금주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국내외 여러 곳을 뛰어다녔다.송민성
황 할머니가 살던 함흥에서만 스무 명이 넘는 여자들이 모였고 일본인 군인이 그들을 인솔해 기차에 태웠다.
"기차 안에 새까만 종이 커튼이 달려 있고 불도 안 켜서 종일 깜깜해. 가다 서다를 반복했어. 그렇게 한 2~3일쯤 갔을 거야."
다 왔다고 해서 내려 보니 길림역이었다. 역 마당에는 여러 대의 트럭이 서있었고 여자들은 다시 트럭에 실려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한 군인 병원이었다.
"병원에서 군인들의 식사나 빨래를 해 주나 보다 했지 뭐. 배운 게 좀 있으니까(당시 할머니는 함성여자강습소라는 야학에서 일본어와 숫자를 익혔다) 병원에 데려간다고 했거든."
"만주는 그런 곳이야"
고야(小屋, 오두막집)라고 부르는 막사에 짐을 풀고 나자 먼저 와있던 여자 몇 명이 "너희들도 이제 죽었구나. 불쌍하다"며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지만 황 할머니 일행도 곧 그 속뜻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군인들이 찾아왔고 하루에 네다섯 명씩 많게는 마흔 명까지 상대해야 했다.
▲사진과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의 방 한쪽 벽면은 온통 꽃과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송민성
"낮에는 통역을 해. 조선인 졸병들이 일본말을 모르니까 내가 약 이름도 일러주고 그랬다구. 그네들이 말 못 알아듣는다고 많이 얻어맞고 그랬지. 그럼 내가 왜 때리느냐구 또 대들어. 그러면 나도 또 개 맞듯이 맞지. 그리고 밤에는 그 짓을 당하구. 나는 시집도 안 간 처녀라고, 죽어도 싫다고 하면 때리고 여기 오면 다 하는 거라고 윽박지르구 그랬지. 발로 차고 막대기로 찌르고 얼마나 맞았는지 몰라."
처음 얼마간은 밤새 울고 두드려 맞는 일이 계속되었다. 두어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마음껏 울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황 할머니는 지쳐갔다.
"목숨 건져 나가야지, 그 생각뿐이었다구. 한두 달만 지나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돼. 만주가 그런 곳이야."
또 다른 지옥의 시작
그처럼 지옥같은 생활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밥 먹으라는 소리가 없었다. 슬그머니 나와보니 군인이고 트럭이고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해방이 되었다고 했고 그제서야 황 할머니도 '일본인들의 생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591차 수요집회에 참가한 황금주 할머니송민성
"거기서부터 세 달을 꼬박 걸어 내려왔어. 춘천쯤에 와서 석탄차를 탔는데 바닥이고 변소간이고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더라구. 청량리역에 내리니까 그때가 12월 2일이었어. 먹을 것 입을 것 없는 거지꼴로 돌아온 거지."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터졌고 피난길에 만난 네 명의 고아를 거두어 먹이기 시작했다.
"전쟁 끝나고 다시 서울로 왔지. 다리 밑에서 거적 깔고 자고 깡통에다 밥 얻어서 한 숟가락씩 나눠 먹으며 3년쯤 살았어."
딱한 처지를 알게 된 주변 경찰서장과 병원장의 도움으로 자그마한 전셋집과 세간들을 구할 수 있었다. 병원장은 자궁적출수술도 무료로 해주었다.
네 아이를 아는 집의 호적에 올려 학교를 보내고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자식과 다름없는 아이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지금은 황 할머니 혼자 살고 있다.
"역사에 뭘 남길 거야? 우리들 다 죽고나면 어떻게 할 거냐구?"
황 할머니가 피해자 신고를 한 것은 최초로 위안부 증언을 했던 김학순 할머니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난 직후인 91년 11월이었다.
▲지난 12월 18일에 열린 '위안부' 기념관 건립에 씨앗 자금을 내놓은 황금주 할머니송민성
"그때부터 지금까지 13년이야. 외국만 24개국을 갔다 왔어. 그렇게 뛰어다녔는데도 변한 것이 없어. 일본은 그렇다고 쳐. 우리 정부는 뭐하는 거야? 우리를 허술히 보니까 그런 거라구. 독도 문제도 딱 부러지게 한 마디 못하는 바보들인 걸 뭐. 아무리 호소를 해도 모른 척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앨범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대통령된 사람들 다 그랬다구, 할머님들 한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래놓고 대통령 되면 한 마디도 못하지. 우리가 13년을 싸워도 말 한 마디 못한다구. 한심하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 | 소수인권 보호를 위한 공적상 수상 | | | | 황금주 할머니는 제55회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었던 지난 12월 10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수여하는 소수인권 보호를 위한 공적상을 수상했다.
황 할머니를 추천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이유로 수요집회에 꾸준히 참여하여 피해자들의 인권수호자로서, 시민들의 역사교사로서 활동한 점, 제네바 유엔인권소위원회(92년 8월) 등 국제적 증언활동을 통해 평화의 전도사 역할을 한 점, 일본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국민기금)' 거부를 몸소 실천한 점 등을 꼽았다. | | | | |
"이렇게 해 가지고 역사에 뭘 남길 거야? 우리들 다 죽고 나면 그땐 어떻게 할 거냐구? 죽도록 사과해도 시원찮은 판에 이러고 있으니 우리가 억울하고 서러워서 어떻게 살아."
이제 황 할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소원은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는 것이다.
"돈 다 필요 없어. 더러운 돈 받아 뭐해? 진정으로 사죄하라 이거야. 내 청춘 돌려놓으라 이거야."
13년의 고통과 한이 맺힌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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