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침대 위에서 늑대와 춤을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아내와 영화를 보렵니다

등록 2004.01.15 17:25수정 2004.01.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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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 후쯤이면 결혼 17주년을 맞는다. 그 긴 세월 동안 아내와 다툰 날이 그 얼마이며, 술에 절어 늦게 귀가해 아내의 애간장을 녹인 날이 그 얼마였던가….


그래도 번듯한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아들 둘 낳고 아직 큰 위기 없이 알콩달콩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지난 세월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마음 한 구석이 무언가로 꽉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아내는 내가 술만 먹지 않으면 만점짜리 남편이라고 한다. (눈에 콩깍지가 아직 덮여 있다!) 하지만 나의 과도한 음주를 필두로 내가 아내에게 미안한 점은 정말 한없이 많다.

연례 행사처럼 가뭄에 콩 나듯 치르는 외식도 자장면 한 그릇으로 땜질하고, 유행이나 패션은 차치하고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준 적 없다. 게다가 툭 하면 회사를 때려치고 백수가 되어 마음 고생만 시키고…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물론 그 배경에는 아내의 검약 정신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적으로 지지리 못난 남편 노릇을 한 내 탓임을 잘 알고 있다.

아내에게 미안한 점 중 또 하나는 바로 영화 관람에 대한 것이다. 결혼 후 아내와 영화관을 찾은 적이 두 번밖에 없다. 아니 둘만의 영화 관람을 따지자면 한 번밖에 없다.

한 번은 두 아들 녀석들이 세네 살 때였다. 어쩌다 생긴 공짜표를 썩히기 아까워서 영화관을 찾았다. 아내와 나는 한 녀석씩을 가슴에 안고 <늑대와 춤을>이란 영화를 보았다. 둘만의 오붓한 데이트는커녕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아이들이 보챌까 봐 조마조마했다. 결국 늑대 대신 아이들과 춤추며, 조마조마하게 숨을 졸이면서 영화를 봤다.


또 한 번은 명절날 큰댁을 방문했을 때였다. 아이들을 떼어 놓고 온 터라,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짬이 생겼다. 그 때 본 영화가 <은행나무 침대>다. 이것이 결혼 후 둘만의 오붓한 영화 관람으로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그 후로도 이런 저런 사정과 핑계로 영화관을 찾은 적이 없다. 영화 관람을 위해 아내와의 약속을 하는 동료 직원의 전화를 흘겨 들으며, 불현듯 난 아내와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술도 자제하지 못하고, 돈도 펑펑 벌어주지 못하고, 외식이나 옷장만 등도 여의치 않은 빵점짜리 남편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에는 꼭 영화를 같이 보고 프다는 생각이….

그날은 기필코 아내를 끌고 영화관을 쳐들어가리다. 그 영화가 무엇이어도 좋다. 그저 아내와 나란히 앉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두 손을 꼭 맞잡을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족하리라. 그것으로 아내의 그 긴 내조에 다 보답할 수는 없지만, 그저 둘이서 같은 한 곳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 싶을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은행나무 침대 위에서 늑대와 춤을 추다가,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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