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에 볼 게 뭐가 있다고

강촌 구곡폭포와 문배마을로의 '냅둬요' 여행

등록 2004.01.18 14:34수정 2004.01.18 22:04
0
원고료로 응원
2004년 1월 9일 아침, 88도로를 달리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록 발라드 중 한국인이 제일 좋아한다는 비틀즈의 'Let it be'가 흘러나오고 있다. 근심이 있을 때, 암흑의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상심할 때, 헤어짐이 있을 때 '그냥 내버려 둬(Let it be)'라는 지혜의 말이 들린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도올 김용옥 선생이 노자의 무위사상을 강의하는 중에 'Let it be' 노래를 틀어 놓아 깜짝 놀라게 했다는데 노자의 사상을 'Let it be'와 대비시키다니 기발한 발상이다. '무위'란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 그냥 내버려 두고 순리에 따른다는 'Let it be'와 통한다고 본 것일 게다.

노자는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 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 자들은 서로 전화(轉化)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한 것은 망한다"고 하였다.

모든 사람은 곤경에 처해 있거나 사소한 문제에 매일 맞닥뜨린다. 문제 속으로 섣불리 들어가기보다는 때를 기다리며 내버려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고 문제는 답으로 전화된다고 생각하면 노자의 사상을 잘못 끌어들이는 걸까? 지금 난 강촌 구곡폭포와 문배마을로 'Let it be' 여행을 떠나고 있다.

구곡폭포
구곡폭포김정봉

강촌하면 떠오르는 낱말들. 젊음, 낭만, 학창 시절, 친구, 자전거, 기차…. 난 이런 말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늙은 여행'을 하고 있다. 옆에는 친구 대신 아내가 있고 후배 대신에 아들이 있고 자전거 대신 승용차가 있다. 학창 시절은 먼 과거의 얘기로 추억 속에 맴돌고 있다.


편지, 천국의 계단 촐영지인 경강역에서 본 기찻길, 다음역이 강촌역이다
편지, 천국의 계단 촐영지인 경강역에서 본 기찻길, 다음역이 강촌역이다김정봉

라면이나 막 끓인 된장국 대신 모래무지 조림이 내 앞에 있고 안주 없이 한잔 기울이던 소주 대신 파전이며 빈대떡과 함께 동동주가 앞에 있다. 별 재미 없는 얘기인데도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었는지 헤헤거리던 웃음 대신 아들 앞에 체통이라도 지키려고 하얀 이는 감추고 반 웃음만 짓는 아버지의 웃음만 있다.

사화과학을 공부하며 밤새 토론하던 그런 열기는 식어 가고 날이 어두워지면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마음을 죄는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


구곡폭포(九谷瀑布). 아홉 굽이를 돌아 들어가야 만난다는 구곡폭포. 이름처럼 아홉 굽이를 돌지는 않지만 그다지 깊지 않아 부담을 주지 않는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약간 오르막에 이르면 새끼 폭포가 몇 개 연달아 있고 그 위를 쳐다보면 몇 십 미터가 되는 가파른 얼음 기둥이 솟아 있다.

구곡폭포
구곡폭포김정봉

한 겨울이 되면 전국 전문 산악인이 모여드는 빙벽 등반의 명소이다. 70m에 달하는 빙벽은 하루 종일 햇볕이 들지 않아 빙벽 타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몇 명이 모여 빙벽을 타고 있었다.

구곡폭포
구곡폭포김정봉

그들은 빙벽을 찍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희열을 느끼고 빙벽을 찍을 때나는 소리와 느낌이 좋다고 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소리가 나를 즐겁게 한다.

스파이더맨 같다
스파이더맨 같다김정봉

나는 폭포의 얼음 기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수천 년 동안 결빙과 해빙을 반복하며 그 자리를 지켜 온 폭포를 느낀다. 그리고 얼음 기둥을 지탱해 내기 위해 얼음 기둥 속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려한다.

문배마을. 구곡폭포 입구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언덕 길이 나있다. 문배마을 가는 길이다. 몇 번이고 꺾인 길을 가다 보면 고갯마루에 이르게 되는데 이 길은 걷기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재미있다.

문배마을 가는 길
문배마을 가는 길김정봉

S자 모양의 구불구불한 길모퉁이를 돌 때면, 겸재 정선이 동해안 변에 있는 독벼루라는 절벽을 그린 '옹천'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장면이 떠오른다. 비록 나귀의 뒷발은 보이지 않아도 모퉁이를 돌아가면 바로 어떤 길이 전개될까 자못 궁금하게 한다.

겸재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 중 옹천의 세부(화인열전1 재촬영)
겸재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 중 옹천의 세부(화인열전1 재촬영)역사비평사

설이 되어 어머니가 장에서 설빔을 하나 가득 이고 오던 장면이나 십리 정도 걸어서 학교를 다녔던 옛일 등 이런 저런 추억을 떠올리며 40분 정도 걷다보면 어느새 고갯마루에 닿는다.

고갯마루에 올라선 순간 산 정상 뒤로 펼쳐진 넓은 분지. 고개 너머로 이렇게 넓은 분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만여 평에 이르는 분지엔 10가구 정도의 집들이 흩어져 있다. 그 중 두 가구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는 식당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문배마을 전경
문배마을 전경김정봉

고갯마루에서 보는 문배마을이 어떤 이는 한 폭의 풍경화 같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저 평범한 우리 나라 마을 풍경이다. 평범한 마을이어서 더욱 좋다.

문배마을 안내도
문배마을 안내도김정봉

하지만 요새 여기를 찾는 이가 많아져 그들의 욕구에 맞춰 동동주며 몇 가지 먹거리를 팔고 있어 이제는 평범하지 않은 마을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변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조차 어찌 보면 우리의 욕심일 게다.

아까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오르는데 중년 남자 두 분이 여기에 뭐 볼게 있다고 오냐고 말을 주고받는다. 그렇다. 구경 삼아 오면 아무 것도 볼 게 없다. 그저 걸으면서 옛 생각도 해보고 문배마을 사람들이 예전에 춘천에 나가려면 걸었던 길이기에 따라서 걸어보는 것이요, 그저 길이 있기에 걸어보는 것이다. 속으로 나오는 말

'Let me be. 날 내버려둬요, 냅둬요. 그저 내가 좋아서 걷는 거예요.'

어느새 'Let it be'여행이 'Let me be' 여행이 되고 있었다.

문배마을 가는 길. '냅둬요'길로 부르고 싶다
문배마을 가는 길. '냅둬요'길로 부르고 싶다김정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콩나물밥 이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콩나물밥 이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2. 2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3. 3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4. 4 사진에 담긴 진실...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 끝난다 사진에 담긴 진실...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 끝난다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