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바리' 후배는 고향 생각 간절합니다

군대 간 후배에게 걸려 온 설 안부 전화

등록 2004.01.19 10:59수정 2004.01.1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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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과 같은 명절이 되면, 재작년 이맘때 군대 간 후배한테 두말할 것이 없이 전화가 옵니다.


"이 전화는 수신자 부담전화입니다. 띠 하는 소리가 나면, 상대방을 확인하시고 원할 경우, *버튼을. 원치 않을 경우, 끊어주세요"

"띠… 형님~ 접니다!"

한참 녀석 얼굴을 잊어먹을 만 하면, 이런 명절 때마다 전화를 합니다. 그래도, 불과 2년 전만 해도 같은 연극반에서 친한 선후배로 작업을 하던 친한 녀석이죠.

녀석은 이번 설도 군대에서 보내는가 봅니다.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군대에서 일개 사병의 몸으로 자기가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만큼 휴가를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어제는 폭설로 외곽근무 서다가 부대로 복귀하는데 만 평소 두 배가 넘게 걸렸다, 이제 자기도 소대에서 어느 정도 밥(계급)이 된다, 유난히 자기를 괴롭혔던 고참이 얼마 전에 전역했다는 둥, 녀석의 군 생활 얘기는 이미 제가 다 겪은 얘기 투성이지만, 녀석은 신이 나서 끝낼 생각을 안 합니다.


수신자 부담전화가 10분이 넘어가는 때부턴 전화비 생각에 약간 긴장까지 됩니다. 하지만 명절 때라도 이렇게 저를 기억해줘서 전화해 주는 녀석이 고마울 뿐입니다. 그리고 저도 군대에서 설을 보내봤기에 그 심정을 이해합니다.

아무리 경기 한파로 이곳 사회 사정도 좋진 않지만, 군대에서의 설은 더 외롭고, 쓸쓸합니다. 전방이라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는 엄청난 양의 눈,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살을 엘 것 같은 매서운 바람, 거기에 악으로 깡으로 한겨울 최악의 훈련인 혹한기 훈련은 꼭 설 전에 치러내기에 더 합니다.


하지만 그 혹독한 추위와 훈련보다도 군인들을 외롭고 쓸쓸하게 하는 것은 이런 설 명절에 함께 지내지 못하는 고향, 가족들, 친구들 생각입니다.

설 명절 때면 으레 가족들과 모여 정성스레 할아버지 제사를 지냈고,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떡만두국을 도란도란 앉아 맛있게 나눠 먹었고, 평소 보지 못했던 친척을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받은 세뱃돈으로 내기 게임도 하고, 시끌벅적 그렇게 즐겁게 밤을 지샜습니다.

설이면 당연히 했던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가족과 친지와 함께 했던 시간을 단 일분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두 해를 넘겨 나이를 드셔, 몸이 성치 않으신 부모님 걱정이면, 약 한 첩 사드리지 못하는 현실에 그리움은 금새 괴로움이 됩니다.

저도 그랬듯이 녀석도 그 외로움과 그리움을 이 수신자 부담전화로 푸는지 모릅니다. 이런 설 명절에 휴가도 갈 수 없는 상황이면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선·후배들에게 하는 전화 한 통화가 군인에게 큰 낙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 번 잡은 전화는 두서없이 길어지고 일쑤이고요.

식사집합이라 할 수 없이 전화를 중단한 후배의 힘없는 목소리가 내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도, 10분 정도가 넘는 통화였는데, 녀석은 많이 아쉬었던 모양입니다.

녀석의 군부대 주소가 적혀 있는 노트를 뒤늦게 찾아봅니다. 이번 설에는 고향생각에, 부모님 생각에 쓸쓸하고 외로운 '군바리' 후배에게 초코파이 한 상자라도 보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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