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방에 걸린 여러 살림살이를 누가 다시 쓸까요? 형광등이 설치된 이후로 서까래에 사료부대로 도배 한번 하고 말았어도 오랜 동안 잘 버티는 걸 보면 꽤 잘 유지한 것 같습니다.김규환
그래 얼마 만인가. 외숙모와 형제를 만난 게 중학교 1학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벌써 22년째다. 먼 세월을 지나 옛 애인을 찾듯 꿈에 그리던 외갓집을 오게 되다니.
아들 손자 뒷바라지하느라 멀리 부산에 가 계신 외숙모는 차례를 모시고 일찌감치 시골 마을에 들어와 계셨다. 30여 분 기다리니 제천 형, 근희 누나, 평남 형, 평태 형과 동생 재남 중 근희 누나만 시댁에 있어 오지 못했다. 우리 온다는 소식에 여든 넘은 유일한 이모 한 분도 오셨다.
"오메, 요 이쁜 것들을 놔두고 재순(자꾸 들어도 까먹는 어머니 어릴 적 이름, 순금(順今)으로 알고 있었다.)이가 먼저 가부렀어!"
"이모님, 그래도 산 사람이 더 낫지요?"
"말이다 뿐인가."
"여긴 막둥이 딸래미입니다."
"그려 그려."
난 늘 궁금한 게 있었다. 어머니 친정이 이 마을 수산리다. 그런데 수산댁은 먼저 시집 온 친구 육남이 어머니가 수산댁이니 그도 그럴 법 하지만 '냉기댁'인지 '남개댁'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외숙모, 우리 엄마 택호가 뭐예요?"
"냉기댁!"
"냉기라는 마을이 있어요?"
"여기서 쬐까만 더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있어."
"아, 그래요."
서먹서먹함도 잠시 큰형은 오십이 넘었고 마흔 줄을 넘긴 형들과 재회를 했다. 반가이 맞아준 사촌 형제들. 싸들고 온 갖가지 음식이 들어왔다.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대낮 술잔, 안부를 묻고 과거 아름다웠던 시절을 퍼 올렸다.
"엄니, 우리 선산 조성할 때 뗏장이 드문드문했는데 규복이가 인부들 데리고 와서 잔디를 다 심었다요."
"그려? 난 그것도 모르고 니들이 다 한 줄 알았다. 외갓집이라고 애썼구만."
"아녀라우. 잔디가 좀 남아서 다른데 작업하다 오는 길에 좀 심은 것뿐인데…."
"동생, 오늘도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 와 주니 고맙네."
"형, 그건 그렇고 산소에나 한번 다녀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