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설, 22년만에 외갓집에 갔습니다

외숙모와 형제들을 만난 2004년 설 떠나오기 싫었습니다

등록 2004.01.25 12:08수정 2004.01.2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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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처마에 걸린 고드름
외갓집 처마에 걸린 고드름김규환
아버지는 처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500m가 넘는 검덕굴(黑石)을 넘어 일년에 몇 번은 꼭 다녀오셨다. 평소에도 '외갓집 모르면 짐승과 같은 것이여!'라며 우리에게 당신의 처가이자 어머니의 친정인 외갓집을 같은 마을에 있는 큰댁보다도 편하고 가고 깊은 곳으로 만들어 놓으셨다.


지금은 교통이 편리해져 산만 넘으면 되는 반대편 동네를 차로 30분은 달려야 갈 수 있는 거리다. 여름엔 숲으로 차고 겨울엔 허리춤까지 쌓인 눈밭을 헤치고 구르며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행로는 언제나 따뜻했다.

우리 형제자매는 유일한 교통 수단인 발에 의지하여 2시간 거리를 자주 오갔다. 일년에 최소 삼촌 약을 갖다드리러 두 달이 멀다하고 형제끼리 심부름을 갔고 추석, 설 때도 빠짐없이 갔다. 그렇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1982년까지는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삼촌이 먼저 세상을 뜨고 외할머니가 아들 뒤를 따랐다. 전남도당사령부 곡성군당 위원장이었던 김장현(金章炫). 산사람이었지만 사람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를 구제해야 한다는 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후 잠깐의 복역과 출소 후 후유증으로 외삼촌은 하산 후 얼마 가지 않아 지병을 얻어 3년여 앓았다. 마취제에 의존하여 연명하다가 그마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지자 한 많은 세월과 가족을 남기고 하직을 하고 만 것이다.

백아산 뒷쪽 곡성군 삼기면에서 화순군 북면을 바라 보면 이 차일봉이 보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 차일봉은 고지선점 작전 때문에 낙하산이 수도 없이 뜨고 내렸던 곳입니다.
백아산 뒷쪽 곡성군 삼기면에서 화순군 북면을 바라 보면 이 차일봉이 보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 차일봉은 고지선점 작전 때문에 낙하산이 수도 없이 뜨고 내렸던 곳입니다.김규환
어린 나에겐 외삼촌과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이제 일흔 네 살이 되신 홀로 남은 외숙모는 말씀이 옥구슬처럼 맑고 정감이 넘쳤다. 항상 너그러이 웃으며 맞아 주셨고 산골에 사셨지만 우리 집보다 늘 넉넉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셨다. 모든 게 맛났는데 게 중 배추에 실고추 넣고 배를 넣어 담근 동치미 맛은 일품이었다.


사실 군(郡) 경계만 아니었으면 곡성군 삼기면 수산리와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은 왕래가 잦았다. 산 하나만 넘으면 지척이었으니 천렵(川獵)할 때 넘기 일쑤였고 열 댓 넘은 청년들은 나무하러 가서 지게 작대기를 들고 쌈박질을 하며 친해지기도 했던 그냥 산 넘어 동네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임종 하루 전날 형제들을 다 불러모으시고는 마지막으로 외갓집 식구 중 맏이인 재천이 형을 찾기도 하셨다. 최근 다시 처갓집이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는 있지만 처가(妻家) 사람들을 잊지 않고 오랜 동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게 우리네 가풍이었다.


마을 입구에 솟대가 솟아 있습니다. 솟대는 땅과 하늘 사람과 하느님과의 소통의 장입니다.
마을 입구에 솟대가 솟아 있습니다. 솟대는 땅과 하늘 사람과 하느님과의 소통의 장입니다.김규환
나는 1987년 12월 22일 동짓날 외숙모 홀로 계신 외갓집을 혼자서 다섯 시간 여 긴 산행 끝에 방문했지만 외숙모를 만나지 못하고 마루에 놓인 동지팥죽만 비우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뒤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외숙모 살아 계실 때 다시 찾아 뵐 수 있을까 늘 걱정이었다.

이번 설은 특별한 기회였다. 작년 설에는 눈 쌓인 백아산 마당바위에 올라 형제자매들끼리 위령제를 지낸 적이 있던 터라 여동생이 "오빠, 등산화를 챙겨야 돼?" 한다. "그래 챙겨봐라." 하고는 귀향 길을 서둘렀다.

연일 가는 곳마다 폭설이 내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서울에서 내려가던 중 동생이 먼저 제안을 한다.

"오빠 이번엔 꼭 외갓집 갔다 오자."
"그래. 외숙모 살아 계실 때 꼭 한번 가야지. 이번 설에는 백아산 올랐다가 바로 가자."
"많이 늙으셨겠다."
"일흔이 훨씬 넘을 건데."

섣달 그믐날 밤 가족끼리 음식을 만들며 술 한잔을 하며 즐기고 있는데 형에게 전화가 왔다.

예전 썼던 화장실인 측간의 한 형태. 돌 덩이 두개 올려 놓고 재나 왕겨를 뿌리다가 노깡으로 합수통을 만들어 푸세식으로 바뀌고, 이어 공중화장실, 그리고 수세식, 좌변기, 요즘은 비데까지...
예전 썼던 화장실인 측간의 한 형태. 돌 덩이 두개 올려 놓고 재나 왕겨를 뿌리다가 노깡으로 합수통을 만들어 푸세식으로 바뀌고, 이어 공중화장실, 그리고 수세식, 좌변기, 요즘은 비데까지...김규환
"예, 형님. 지난 추석 때는 근희 누님도 왔다면서 우리만 빼고 그럴 거요? 내일 오전 11시까지 갈랑께 그 때 봅시다."
"알았어. 광주에서 차례 모시고 일찍 출발 할텡께 집에서 보자고."

저녁때부터 굵어진 눈발은 정월 초하루 아침까지 퍼부었다. 날씨 마저 영하 15도 까지 떨어졌다. 선산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어 아랫녘에 모신 아버지만 뵙기로 하고 다른 곳엔 들르지 않았다.

대강 챙겨 입은 옷을 고칠 틈도 없이 형님 내외와 우리 식구, 여동생까지 총 9명이 외갓집을 향해 떠났다. 비록 차를 이용해 떠난 길이지만 가슴이 설렌다.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는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마음에 다들 들떴다.

지름길로 난 빙판 길을 40여 분 달렸을까. 곡성군 오산면, 겸면, 삼기면 원등마을과 근촌을 지나 시골길로 접어들어 가니 익숙한 산세(山勢)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 쪽으로 펼쳐지는 6∼700m 대 산줄기 중 저기는 방촌 뒤편일 게고 그 다음은 투구바위, 이어서 차일봉 뒤쪽일 것이다. 두 줄기를 지나 검덕굴을 넘는 고개다.

약간의 변화는 있으되 여느 농촌과는 달리 예전 그 모습 그 대로다.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 막다른 곳에 차를 조심히 대니 외갓집 바로 앞. 마당으로 들어서니 행랑채는 변함없다. 헛간 측간이 그렇고 불 때던 아랫방이 그대로다. 방안 구조도 그렇다.

아랫방에 걸린 여러 살림살이를 누가 다시 쓸까요? 형광등이 설치된 이후로 서까래에 사료부대로 도배 한번 하고 말았어도 오랜 동안 잘 버티는 걸 보면 꽤 잘 유지한 것 같습니다.
아랫방에 걸린 여러 살림살이를 누가 다시 쓸까요? 형광등이 설치된 이후로 서까래에 사료부대로 도배 한번 하고 말았어도 오랜 동안 잘 버티는 걸 보면 꽤 잘 유지한 것 같습니다.김규환
그래 얼마 만인가. 외숙모와 형제를 만난 게 중학교 1학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벌써 22년째다. 먼 세월을 지나 옛 애인을 찾듯 꿈에 그리던 외갓집을 오게 되다니.

아들 손자 뒷바라지하느라 멀리 부산에 가 계신 외숙모는 차례를 모시고 일찌감치 시골 마을에 들어와 계셨다. 30여 분 기다리니 제천 형, 근희 누나, 평남 형, 평태 형과 동생 재남 중 근희 누나만 시댁에 있어 오지 못했다. 우리 온다는 소식에 여든 넘은 유일한 이모 한 분도 오셨다.

"오메, 요 이쁜 것들을 놔두고 재순(자꾸 들어도 까먹는 어머니 어릴 적 이름, 순금(順今)으로 알고 있었다.)이가 먼저 가부렀어!"
"이모님, 그래도 산 사람이 더 낫지요?"
"말이다 뿐인가."
"여긴 막둥이 딸래미입니다."
"그려 그려."

난 늘 궁금한 게 있었다. 어머니 친정이 이 마을 수산리다. 그런데 수산댁은 먼저 시집 온 친구 육남이 어머니가 수산댁이니 그도 그럴 법 하지만 '냉기댁'인지 '남개댁'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외숙모, 우리 엄마 택호가 뭐예요?"
"냉기댁!"
"냉기라는 마을이 있어요?"
"여기서 쬐까만 더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있어."
"아, 그래요."

서먹서먹함도 잠시 큰형은 오십이 넘었고 마흔 줄을 넘긴 형들과 재회를 했다. 반가이 맞아준 사촌 형제들. 싸들고 온 갖가지 음식이 들어왔다.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대낮 술잔, 안부를 묻고 과거 아름다웠던 시절을 퍼 올렸다.

"엄니, 우리 선산 조성할 때 뗏장이 드문드문했는데 규복이가 인부들 데리고 와서 잔디를 다 심었다요."
"그려? 난 그것도 모르고 니들이 다 한 줄 알았다. 외갓집이라고 애썼구만."
"아녀라우. 잔디가 좀 남아서 다른데 작업하다 오는 길에 좀 심은 것뿐인데…."
"동생, 오늘도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 와 주니 고맙네."
"형, 그건 그렇고 산소에나 한번 다녀옵시다."

눈길을 걸어 귓때기가 시려 떨어져 나가던 설날 외삼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갔습니다.
눈길을 걸어 귓때기가 시려 떨어져 나가던 설날 외삼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갔습니다.김규환
간소하게 가족묘를 단장해 놓았다. 저 멀리 호남고속도로가 보였다. 확 트인 공간에 자리한 묘 자리는 좌우로 거느린 풍수가 무난해 보였고 뒤론 백아산을 받치고 있으며 햇볕도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대화를 나눴다.

"형, 갑시다."
"난 가기 싫은데…. 그냥 나만 놔두고 가면 안 될까?"
"아따 같이 조문 가기로 했음시롱."
"그러면 여기서 자고 오든가."

토요일에 근무하는 사람만 없다면 하루 더 묵고 싶었다. 아쉬움 가득 품은 채 먼저 가신 분들 빼고 무럭무럭 자라는 두 가족 새 식구들과 외갓집 사람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마치고 그립고 정겨운 외갓집을 떠나왔다.

"외숙모 올 추석 때도 올께라우."
"그려 건강들하고 돈 많이 벌어라."
"갑니다."

어른들 살아 계실 적에 사진 한장 남기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입니다.
어른들 살아 계실 적에 사진 한장 남기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입니다.김규환

덧붙이는 글 | 추석에라도 외갓집에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추석에라도 외갓집에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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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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