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이름 없는 역사의 현장

백마산에 산재한 역사의 흔적들

등록 2004.02.01 22:25수정 2004.02.0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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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강에서 본 백마산
경호강에서 본 백마산이재은
2004년 1월의 마지막 날, 진주로 가는 길에 한 이름없는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육십령 터널을 지나 함양 땅에 도착해 보면 지리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여기서 몇 분을 더 가노라면 뱀사골에서 흘러내린 물과 덕유산에서 내린 물이 합쳐지는 경호강을 만나게 된다.

2003년 여름에 찍은 사진으로 직경 15cm, 깊이 15cm 정도의 구멍들이 100 여개 산재 해 있다.
2003년 여름에 찍은 사진으로 직경 15cm, 깊이 15cm 정도의 구멍들이 100 여개 산재 해 있다.이재은
'백마산'


이 고유명사는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서 지명으로 사용된다. 그 이름이 풍기는 뉘앙스 때문에 아마도 예사롭지 않은 내력을 가진 지명일 것 같은데, 이곳의 백마산은 그리 알려지지도 않은, 더구나 주변 사람들마저도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산이다.

높이가 262m인 이 산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에 위치하고 지리산맥의 동쪽 끝자락임을 알리는 강, 경호강 가에 우뚝 서 있다. 남으로 십여 km를 내려가면 진주시가 있고 서쪽으로 그만큼 가면 바로 지리산의 주봉이 있는 곳이다. 강가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산세가 가파라서인지 낮은 높이임에도 불구하고 '우뚝' 서 있다는 표현이 제격에 딱 맞다.

국도 3호선이 이 산 바로 밑을 지나는데 산 어귀 작은 마을에 차를 대고 산을 오르다 보면 작은 암자 앞에 안내판이 나오는데, 백마산의 내력을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시 의병들이 백마산성에 고립. 한여름 가뭄이 심한 때 백마산성에서 왜병에 포위되었는데 여러 마리의 말 등에 쌀가마를 계속 쏟아 부으니 밑에 있는 왜병들의 귀에는 마치 산 위에서 물 흐르는 소리로 들려 물이 고갈되면 항복할 것을 기대했던 왜병들은 십여 일의 포위망을 풀고…"

이 산은 3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남쪽의 산길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서면 평평하고 넓은 성터가 나오는데 둘레가 1km쯤 되는 작은 산성이다. 시대를 달리하는 수많은 기와·토기 파편들이 널려있고 성루, 건물터, 창고터, 해자, 연못터 등 성안에 자라는 소나무를 다 베어내면 지금이라도 당시의 요새가 살아날 것 같은 그런 분위기다.


서쪽 절벽 가까이에 있는 한 암반에서 발견한 '김구'.  '백범 김구'인지 필부 김구인지?
서쪽 절벽 가까이에 있는 한 암반에서 발견한 '김구'. '백범 김구'인지 필부 김구인지?이재은
도굴의 흔적-파 놓은 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정상부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어 여기가 고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도굴의 흔적-파 놓은 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정상부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어 여기가 고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이재은





























목책을 박기 위해 판 것으로 추정되는 돌구멍 100여 개와 항상 물이 고여있는 인공연못 3개. 어디 그 뿐이랴? 서쪽 끝자락 암반 위에 음각으로 판 '金九'라는 글을 마주하노라면 작은 이 산이 담당했던 역사적 사건들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 글의 주인이 '백범 김구'인지 범부 김구인지는 몰라도.

하지만 낙엽 밑에서 풀숲 아래서 서서히 뭉개지고 사라져 가는 이 모든 역사의 흔적들은 산성의 북쪽 벼랑을 내려가서 동으로 우회하는 산기슭에서 만나는 엄청난 충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쉽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분 3기. 그 중에서 정상부가 함몰된 것이 2기, 측면부가 사정없이 파헤쳐지고 안으로 구멍이 뻥 뚫린 곳이 1기. 높은 신분을 가졌던 어떤 선인의 음택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큰 규모다.

경호강 주변에 많은 가야 유적이 산재한 것으로 봐서 이 역시 가야의 고분일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보지만 어디에도 그런 안내판 하나, 보호시설 하나 없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후손들의 밭이 되고 과수원의 일부가 되어 쓸쓸히 사라져 가는 이 작은 산의 역사는 어느 누가 제대로 알아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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