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얼짱' 보도, 차라리 낙종이 낫다

[取중眞담] 언론사들의 얼짱 보도 경쟁에 멍드는 사람들

등록 2004.02.02 17:40수정 2004.02.0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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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특종(特種)해서 기분 나쁘고, 낙종(落種)하고도 기분 좋은 기자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정당팀장을 맡고 있는 저는 최근 심각한(?) 낙종을 하고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제 스스로 자발적인 낙종을 선택한 것은, 최근 스포츠신문에서부터 종합일간지·경제지·방송사 시사 프로그램에까지 등장하는 '정치권 얼짱'에 관한 기사입니다.

정치권 얼짱의 한 사람으로 보도된 민주당의 20대 한 여성 당직자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뒤 유력한 검색 사이트에서 인물 검색 순위 1위에 오를 정도로 관심 폭발 그 자체였습니다. 불과 며칠 전 언론에 보도되기 전만 해도 그는 정치적 '무명씨'였습니다. 그조차 외모로 평가되는, 언론에 의해 상품화된 자신의 모습에 대해 당혹스러움과 불만을 토로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저는 젊은 네티즌들의 톡톡 튀는 감성이 만들어낸 '얼짱' 문화에 대해서 무조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습니다. 잘 생긴 얼굴이 자랑이면 자랑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외모만으로 평가받거나, 외모가 사람 판단의 최우선순위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하위순위인양 착시 현상을 부추기는 도미노식 언론 보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권 얼짱 보도가 외모 지상주의를 불러일으킨다는 일반론적인 비판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선천적인 조건이나 요소가 있고, 후천적인 그것이 있습니다. 전자는 본인의 노력이나 선택과는 무관하게 나의 것이 되고, 후자는 최소한 본인의 노력이나 의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한 사람의 얼굴은 국가·모국어·부모형제 등처럼 개인의 선택이나 노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선천적인 영역에 가깝습니다. 개인의 자유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선천적인 조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다른 면에서 보자면 많은 사람들에게서 '노력과 선택'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선택할 수도 없고, 개인 의지로 극복할 수도 없는 문제에 이미 점수가 매겨져 있다면 세상은 운명론이나 숙명론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뛰어난 외모 덕에 얼짱으로 추켜세워지는 당사자들도 넓은 의미의 피해자에 속합니다. 특히 언론에 의해 '간택된' 정치권 얼짱의 경우, 자신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능력은 얼굴에 가려져 빛을 못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얼짱 신드롬'을 소개하면서 은연중에 독자나 시청자들로 하여금 '능력보다 얼굴로 한몫 하는 사람'이라면 편견을 심어놓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얼짱'으로 소개되는, 판사 출신의 나아무개 한나라당 공천 심사위원은 최근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얼짱 보도 탓에) 아무도 나를 공천심사위원으로 여기지 않고 능력으로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며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언론이 그에게 붙여 놓은 꼬리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회창 전 후보를 보좌했던 미모의 여성 특보'라는 것입니다. 이 꼬리표에는 '정치권의 꽃' '정당의 액세서리'라는 부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이와 같은 엇나간 '얼짱 보도'는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안겨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마치 아프리카 불개미 떼가 지나간 뒤 앙상한 뼈다귀만 남는 야생 동물처럼, 개인에게 크나큰 상처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또한 네티즌의 얼짱 문화와는 달리 언론들의 '정치권 얼짱' 보도는 자칫 유권자들을 심각한 정치적 사시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얼짱 보도와 같은 저널리즘이 계속된다면, 머지 않아 정치권은 얼짱이거나 얼짱이 아닌 사람, 두 부류로 분류할 것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을지도 모릅니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새 인물 영입을 놓고 수시로 충돌하고 있다. 이같은 양당의 갈등구조에 20대 여성 '얼짱' 두 명이 가세했다. 이들은 얼굴뿐 아니라 실력까지 '짱'으로 평가되면서 양당을 대신해 불꽃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오는 4월 총선에서 양당의 얼굴로 나서 바람몰이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얼짱' '몸짱' 등 각종 '-짱'이 유행처럼 번져가면서 얼굴만 예쁘면 최고라는 식의 지나친 외모 지상주의가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 얼짱으로 꼽히는 민주당 전세연 사이버공보팀장(여·27)과 열린우리당의 윤선희 청년위원장(여·28). 아직 20대에 불과하지만, 오는 4월 총선에서 양당의 얼굴로 나서 바람몰이 역할을 해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위는 '정치권 얼짱' 보도의 원조격인 한 스포츠신문이 지난달 14일 보도했던 기사이고, 아래는 한 중앙일간지가 2일 '얼짱 신드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던 기사입니다. 정치권 얼짱 소개 기사이건, 이런 문화에 대한 비판 기사이건 한결같이 '얼굴(을 무기)로 총선 바람몰이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은연중에 언론에서 얼짱들을 '정당의 액세서리'인양 취급하고 있습니다.

'십 수년 동안 바닥에서 묵묵히 일했던' 당직자들이 뛰어난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는 결격 사유로 정치에 갓 입문한 얼짱들보다 뒤처져야만 한다는 건 정치 손실이자 퇴보입니다. 이는 생각 있고 능력 있는 얼짱들에게도 역차별이자 모독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론들이 선정한 '정치권 얼짱' 모두가 젊은 여성 당직자들이라는 점에서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와 보도 관행이 빚은 결과라는 생각도 듭니다. 비례대표의 50%를 여성으로 한다는 선거법 개정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천편일률적인 정치권 얼짱 보도는 우리 언론의 자위행위처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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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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