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41

등록 2004.02.06 09:10수정 2004.02.0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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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그렇게 말한 후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재상도 노인의 뒤를 따랐다. 애초에 재상은 태왕의 분부대로 말 다섯필 정도는 살 작정이었다. 하지만 무기며 다른 군수품 구입에 지출이 많은데다, 굳이 다른 장수들에게까지 그 귀한 말을 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에인의 몫만 사들인 것이었다.

만약 정벌군이 수만에 이르고 정벌지 또한 큰 대궐이나 성을 갖춘 거대 국이었다면 문제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정벌지는 사방 백리에 속한다는 조그만 영토였다. 그런 곳을 토벌하러 가면서 장수들까지 명마를 탄다면 그건 거지소굴로 나들이를 떠나는 왕족의 행차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었다.


재상은 또 문득 제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성공만 한다면 주변 부족들이 금과 구리를 가져올 것이고 멜루하(이디오피아)에서는 귀한 보석을 가져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 공주의 남편이 우리 제후국 사람이라 우리가 영토만 찾는다면 후히 치하할 것입니다.'
'멜루하에서는 또 무슨 연유로 그런 치하를 한다는 것입니까?'
'자기 나라가 튼튼하면 공주로부터 받는 대접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아무튼지 그 모든 답례품은 소호 국으로 다 돌려드릴 테니 부디 후원군사가 늦지 않도록 조치해주십시오.'

제후는 자기 영토가 세상에서 가장 크거나 그곳 탈취 자가 어느 강대국보다 강한 것으로 엄살을 떨었지만, 재상과 강 장수의 판단으로는 정예군 천명으로도 충분히 대적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후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은 만일을 대비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린 에인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에인도 천명으로 충분히 해낼 것이다. 처음으로 하는 연설에서도 이 아이는 상, 하부와 그에 대한 군중심리를 하나로 묶어냈다. 그런 힘이라면 후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다 평정할 것이다.'

노인을 따라 방에 앉자 곧 술상이 들어왔다. 사실 그들은 잠을 잘 시간이 없었다. 해줘야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노인이 두 부자의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장군, 술상을 들여온 것은 두 부자지간에 아직 이런 형식을 가진 일이 없었다고 들어서입니다."
"예, 그러합니다. 에인이 조의선인에 선발되는 날 성년식 삼아 부자간 술상을 받아보려고 했는데 그 전에 제가 그만 이리로 오는 바람에 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대답하며 노인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이제 우리 셋이서 들어야겠습니다."
노인이 잔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한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에인이 주춤거리자 노인이 북돋아주었다.
"장군, 앞으로 군사나 장수들에 의해 술을 마실 일도 생길 것입니다. 그 전에 미리 술을 익히고 그 요령을 알아두면 대처하기도 쉬울 것이니, 어서 드시지요."
그것은 산포도로 빗은 과실주였다. 단 맛은 없었지만 거북할 만큼 독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먼저 잔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만약 네가 가는 곳에서 어떤 일이 생기면, 이곳 별읍장님께 전령을 띄워라. 별읍장께서 모두 알아서 대처하실 것이다. 군사나 그 어떤 문제도 먼저 이곳에 알려라."
"예, 그러하겠사옵니다."
"별읍장님은 소호국에서 나와 계신 태왕님의 분신과 마찬가지시다. 다시 말해서 나라 살림을 여기서 보고 계시다고 여기면 된다."
"예."
"전투에 대한 보고, 적지에 대한 상황, 승전까지도 모두 보고해야 한다. 단 제후가 모르게 비밀리에 해야 한다."

별읍장이 에인에게 말했다.
"나도 늘 대기하고 있겠소이다."
별읍장은 에인과 재상을 바라보며 문득 누님이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우님, 들어보아요. 이 왕자들은 늘 함께 그림을 그리며 노는데 동이는 항상 둘레를 그려요. 동그라미, 네모 하여간에 커다랗게 그려놓으면 한이는 그 속에다 집이며, 말이며 그런 것을 그려 넣어요. 언제나 그런답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놀았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왕은 나라 울타리에 전력을 한다면 재상은 나라 안 살림을 꼼꼼히 채우고 있는 것이다.

하다면 에인은 누구를 닮았는가? 별읍장은 가만히 에인의 입매를 살펴보았다. 선왕과 흡사했다. 광대뼈와 콧날은 좀 다르다 해도 많이 닮아 있었다. '아, 그래' 별읍장은 기억을 이어갔다. '선왕도 아주 젊었을 때 강소성을 정벌했지. 영토를 수천리나 넓힌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떠도는 환족을 그곳에 정착시켰지. 에인도 선왕을 닮았으니….'

별읍장은 얼른 에인의 빈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생각을 계속했다. '이 아이도 환족을 활인(活人)할 수 있을 것이다. 기를 잃고 시들거리는 형제국에도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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