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화사한 기운이 온누리에 함께 하기를.느릿느릿 박철
그렇다고 가난해서 주접을 떨 만큼 궁기(窮氣)를 내비치거나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당당했습니다. 정선 지방 44교회 중 43번째였지만 '작다'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삶의 명제가 내 삶의 표지판이었습니다.
두부 한 모 사먹을 돈이 없으면서, 어쩌다 돈이 생기면 책을 샀습니다. 책도 전부 사회과학서적이었습니다. 책을 사는 게 제일 행복했습니다. 그때가 아마 지적인 호기심이 제일 많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산으로 고사리나 나물을 뜯으러 다녔고, 아내는 들로 미나리 등 들나물을 뜯으러 다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말하길 "새로 이사 온 전도사 새댁이 우리 동네 나물이라는 나물은 다 작살내네!" 그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찬거리는 동네 사람들이 더러 갖다 주기도 했지만 자체 해결을 했습니다. 가난했지만 그 시절이 가장 풍족했습니다. 아무 욕심도 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하루하루의 삶이 만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다니시는 서울의 잠실 S교회에서 어머니를 통해 연락이 왔는데, 여선교회에서 매달 5만원씩 내 생활보조금을 보내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S교회 담임목사께서 여선교회 임원들이 담임목사와 의논도 하지 않고 도와줄 교회를 정했다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박 전도사가 운동권이고 기도는 열심히 안 하고, 형제교회 D목사와 친하고, 좌경의식이 있다고 걱정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가 1986년 군사독재정권이 최악의 발악을 하던 시절이 아닙니까? 그 얘길 듣자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한 달에 5만원이라니, 그것도 교회에서 주는 게 아니고 여선교회에서 주는 것이라니 주면 고맙게 받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