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46

등록 2004.02.18 18:22수정 2004.02.1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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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들은 먹던 고깃점도 던지고 재빨리 대열을 지었다. 천막을 치거나 밥을 짓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군장비를 실은 마차는 애초부터 뚜껑도 열지 않았으니 말만 묶으면 그대로 달릴 수가 있었다.

강 장수가 군사들 사이로 누비고 다니며 다시 재촉했다.
"대열을 지을 필요가 없다! 달려라! 도망치듯이 그렇게 달려라!"
벌써 상대의 나귀들이 백보쯤 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병 아장들은 앞서서 달아나라!"
뒤에 처져 보병들을 독려하던 아장들이 강 장수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들을 호위하는 척 하라! 그리고 달아나라!"

보병들과 기병들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쩔 참이오, 강 장수? 군사들을 버릴 생각이오?"
에인이 달리면서 물었다.

"두고 보십시오. 저들은 곧 돌아갈 것입니다."
"버려진 군사라고, 만만해서 더욱 칠 것이 아니오?"

에인이 숨가쁘게 말했다. 뒤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도 갈기처럼 휘날렸다. 아직 갑옷도, 두건도 쓰지 않아 앳되어 보이는 도련님이 무엇엔가 쫓기는 모습이었다. 강 장수는 그런 에인을 흘낏 한번 돌아본 후 안심시키듯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들은 뒤처진 군사들을 쫒진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군사 숫자가 더 많습니다."
에인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적들은 아직도 뒤를 쫒고 있었고 자기 군사들은 달아나는 부모를 잡으려는 고아들처럼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오기만 했다. 에인이 탄식했다.


"아, 참 무정도 하시구려. 저 군사들이 저렇게 욕보지 않도록 무슨 조치라도 좀 취하시오."
"장군님, 조금만 더 모른 척하고 달리십시오."

한 마장쯤 달려오니 산이었고, 길은 그 산길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강 장수는 그 앞에서 멈추더니 뒤돌아섰다. 에인은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음 놓고 군사들을 찔러대는 그런 장면이 거기 있을 것 같았다.


"장군님, 보십시오. 우리 군사들만 달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러했다. 군사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마을 사람들은 멀어져가고 있었다. 강 장수가 예견했던 대로였다. 그 마을 수장과 주민들이 몰려나온 것은 침략자를 막으려는 것이었지 달아나는 사람들까지 잡고 시비를 걸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군사들이 도착하자 아장들이 나서서 대열을 정돈했다. 좌 우군과 각 조가 편대별로 서자 아장들은 자기 조 옆에 말을 타고 나란히 섰다. 가운데는 군사들이, 그 바깥쪽으론 아장들의 말이 줄지어 서자 강 장수가 팔을 쳐들어 앞쪽으로 휙 꺾었다. 행군을 계속한다는 신호였다.

에인은 강 장수의 행위가 점점 이상하게 여겨졌다. 군사들이 대열까지 지었는데 되돌아가서 주민들을 혼내주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곱게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에인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강 장수, 그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겠소이까? 멀쩡한 기병들까지 있으면서도 나귀를 탄 그들을 보고도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났으니 말이오."
"그렇게 보았으면 아주 다행이지요."
"다행이라니요?"

"그들은 우리가 자기 마을을 치러왔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을 소집해 그렇게 나온 것이지요. 한데 그들은 자기들이 먼저 알고 침략자들을 급습했더니 우리가 놀라고 또 그들 기세에 질려 물러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군사도 많은 우리가 그들 기세에 질려 달아났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요."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발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기원할 뿐이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전투를 피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일단 접전이 벌어지면 그것이 크든 작든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또 그 소문이 사방으로 번지게 됩니다. 만약 '딛을 문'까지 그 소식이 전해진다면 우리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 그랬군요. 우리가 목표로 한 전투는 '딛을 문'이다, 우선 그 정벌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싸움은 피해가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역시 맹장은 다릅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장수답지 않게 왜 그렇게 비겁한 전략을 쓰나 했습니다."

그러자 강 장수는 에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장군님이야 말로 대단하십니다. 보통은 그런 말 백번 해봐야 못 알아듣습니다. 실제로 전투를 치러봐야만 이치를 깨치게 되지요."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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