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 가발로 벗어뿌지예?"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38> 공장일기<23>

등록 2004.02.13 12:25수정 2004.02.1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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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제2부 행사에서 나는 가발을 벗어버리고 까까머리로 시를 낭송했다

제2부 행사에서 나는 가발을 벗어버리고 까까머리로 시를 낭송했다 ⓒ 이종찬

"쿡쿡! 큭큭큭!"
"검둥이가 따로 없구먼. 게다가 머리까지 중대가리처럼 빡빡 깎고 있으이 우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구먼."
"그라지 말고 가발이라도 쓰고 다니라카이."



그랬다. 그렇게 4주간에 걸친 병역특례훈련을 마치고 공장으로 돌아오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리쬐는 땡볕 아래 군사훈련을 받느라 얼굴이 새까맣게 탄 데다 머리까지 빡빡 깎고 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내 몰골이 참으로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뒤꼭지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처럼 납작한 편이어서 사출실에 근무하는 여성노동자들이 보기에는 더더욱 우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그 당시 4주간의 특례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동료들처럼 마산 부림시장에 나가 가발을 하나 사서 쓰고 다녔다.

하지만 가발은 우선 주변 사람들 눈가림을 하기에는 좋았지만 쓰고 다니기에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빗을 때에도 가발이 돌아가지 않게끔 조심스레 빗어야 했음은 물론이었고, 금형 세팅을 하다보면 가발 속에 땀이 차서 머리가 몹시 가려웠다. 또한 그럴 때면 무조건 화장실로 달려가 가발을 벗어놓고 머리를 벅벅 긁어야만 했다.

"선배님도 시를 한편 낭송해야겠지요?"
"글쎄. 이런 꼴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할지…."
"행사 때도 가발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어쩐지 께름칙하단 말이야."


그때쯤 하필이면 마산 극동예식장에서 제2회 '남천문학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남천문학회는 내가 회장을 맡고있진 않았지만 그 행사에 빠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작시 낭송은 물론 아예 사회까지 내가 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문학의 밤 행사에 초대한 문인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공장의 총무부와 노무과에서는 '조총련 편지' 사건(?)으로 나로부터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은 터라, 그때부터 내가 아예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며, 문학활동을 아예 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마 행사에 초대받았다고 하이소."
"그라모 이래뿌자. 절마들이 행사에 프락치를 보낼 수도 있으니까, 그날 내 신상에 관한 것은 절대 비밀로 해뿌라. 알것제?"



그랬다. 그때 동인들은 내가 남천문학회에서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함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행사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제1부 행사에서 나는 가발을 쓰고 사회를 보았다. 하지만 예식장에 꽉 찬 사람들의 열기 탓이었던지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가발 속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행사 도중에 가발을 벗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몹시도 간질거리는 머리를 함부로 긁어댈 수도 없었다. 그때 나는 순간순간 가려움을 견디지 못해 사회를 보면서도 손가락으로 가려운 부문의 가발을 꾹꾹 눌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가렵기만 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가려움 때문에 온몸이 절로 배배 꼬이는데도 끝까지 참아내야 하는 수밖에.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가발 속에 채인 땀이었다. 가발 속에 땀이 얼마나 많이 채였던지 나중에는 가발을 조여주는 고무줄을 비집고 이마 위로 땀이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연신 손으로 땀을 훔치면서도 가발이 비뚤어지지 않게 몹시 신경을 써야만 했다.

"고생 많았심니더, 선배."
"어휴! 가려워 죽을 뻔 했다카이. 내 생전 지금까지 사회를 보면서도 오늘처럼 고통스런 날은 정말 처음이라카이."
"정 그라모 2부에서는 고마 가발로 벗어뿌지예?"


그렇게 고통스런 제1부가 지나갔다. 나는 1부가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가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머리부터 먼저 감았다. 정말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2부부터 나는 용감하게 가발을 벗고 까까머리로 사람들 앞에 섰다. 순간 예식장에 가득 찬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 저 사람은 또 누구야? 아까 사회 보던 그 사람 아냐?"
"까막소에서 막 출소했나, 머리가 왜 저래?"
"우리로 가꼬(가지고) 노는 것도 아이고 저기 대체 뭐하는 짓거리고?"
"일마 이것들 혹시 뺄갱이 새끼들 아이가?"


그랬다. 그 당시에만 해도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는 사람들은 승복을 입은 스님이 아니면 대부분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문학의 밤에 참가한 대부분의 동인들이 사회성이 조금 짙은 시들을 낭송하다 보니, 참석한 사람들이 우리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자! 곧 2부 행사가 진행됩니다. 조용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이! 사회 보시는 양반! 당신이 카멜레온이라도 되나?"
"깜빵에 갔다 왔으모 조용히 자숙할 일이지, 머슨 낯짝을 들고 이런 행사에 나서서 사회까지 보노?"
"잠깐, 잠깐만요. 저는 운동권도 아이고 깜빵에 갔다온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지난 주까지 00부대에서 4주간 병역특례교육을 받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랬다. 가발 소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그 일이 생긴 그날 그 가발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주 하찮은 일도 사람들이 보기에 따라서는 더 큰 오해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 우선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가식보다는 하찮은 진실 하나가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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