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배반한 역사yes24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한다. 습관이란 것의 형성과정이 대체로 그렇듯 말이다. 우리나라에 어떤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 이슈를 이모저모 뜯어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고종석이라면 이걸 어떻게 생각했을까, 강준만이라면 어떤 논리를 써서 반격했을까, 진중권이라면…? 이런 식이다. 결코 바람직한 습관은 아니다. 그렇지만 주관이란 것이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은 나란 사람이 빈약하나마 체계를 갖추고 세상을 바라보는데 기여한 습관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럴 때 꼭 잊지 않고 의식되는 사람이 바로 박노자다.
내가 박노자를 처음 알게 된 건(다른 이들도 대체로 그렇겠지만)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을 통해서였다. 그 때만 해도 박노자는 귀화하기 전이었고 노르웨이에 있지도 않았다. 외국인, 그것도 우리나라에 얼마 살지도 않은 러시아인이 그 어렵다는 한자 어휘를 자유자재로 써 먹는데다 우리 역사에 박학한 걸 보고 '이거 큰일 낼 사람(!)이군!'하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그가 한국여자와 결혼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 역사와 정치,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자랑해도 아직까지 나는 박노자가 타자(他者)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게다. 심지어 로버트 할리나 이다도시보다도 멀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엇 때문일까. 나의 인종적, 민족적 편견이 씻기워지지 않은 까닭이 더 크겠지만, 아마도 그의 칼럼이나 세 권의 저서에서 한국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몹시도 객관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감정이 거세된 문체도 그런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데 한 몫 거들고 있다.
내 감성은 아직 그를 타자라고 여기지만, 그의 세계시민주의적 시선은 너무나 믿음직스럽다. 같은 국적의 우리 동포(!) 상당수의 생각과 의견보다 썩지 않은 그의 시선에 더 많은 신뢰가 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온 글처럼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박노자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식의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으니 맹목적 추종은 아니라고 자부한다.
이번 책 <나를 배반한 역사>는 지난 두 권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이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2002)>보다 솔직히 말해 잘 읽히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로, 내가 역사를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룬 근대라는 시공간에는 유독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처럼 우리 현재의 봉건적 요소를 낱낱이 파헤친 것도 아니고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처럼 우리가 이상향으로 여기는 북유럽 국가의 이면과 침략의 역사를 헤집은 것도 아니다.
근대라는 일견 멀어 보이고, 일견 가까워 보이기도 하는 그 시간 (혹은 공간)속에서 현재 모순의 싹을 탐구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상당한 의미와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2할의 교양과 8할의 흥미를 추구하는)들에게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둘째로, 박노자 글의 매력은 그 특유의 건조체로 우리의 봉건적 모습들을 질타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매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는다.
아니, 찬찬히 생각해 보면, 최근의 저작일수록, 최근의 칼럼일수록 더욱 그렇다. 작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 응원을 보는 시각 차이로 상당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이 아닐까하는 의혹마저 생길 정도다.
내가 마조히스트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이 사회를 담담하게 비판할 때 통쾌함까지도 느꼈었는데 조금 위축된 모습이 보여 안타깝다. 나의 착각과 오독이길 바랄 뿐이다.
게다가 - 좀 더 지켜보아야겠지만 - 박노자의 인식이 이제 위험한 경계선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성토나 양심적 병역 거부 전폭적 지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른바 역지사지(易地思之)나 자기성찰에 과다하게 치중해 일어나는 현상이 이 책에서 미약하나마 발견된다는 거다.
현실이 친일파에 계속 너그러웠던 만큼 적어도 지상(紙上)에서라도 단죄할 것은 단죄하고, 판단 내려야 할 것은 해야한다는 충동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내가 느끼는 묘한 감정이라는 것은 폭로나 단죄만이 역사학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 물론 지금에 와서 그들이 민족을 배신했다고 단죄하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단어는 물론 민족에 대한 개념과 정의와 이론을 거의 다 일본에서 수입했던 일제 당시에는 조선의 많은 지성인들이 지금과 상당히 다르게 민족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 장소와 시간의 한계를 넘지 못한 대다수 일제시대의 지성인들에게는 차라리 평범함의 죄를 묻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몇십 년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그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들이 발견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본문 59쪽 - 62쪽)
마지막의 유보적 태도로 보아 아직 박노자 자신도 확실한 결론을 내고 있지 않거나 상당히 민감한 문제제기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설사 이것이 그의 결론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타당함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짝 더 디디게 되면 가해자(혹은 공범자)와 피해자의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결론까지 나올 지도 모른다.
철학적으로야 그럴 수도 있겠으나 역사의 해석이라는 것이, 현재 혹은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너무 도구적 관점일까?) 박노자는 조심스럽게 브레이크 밟을 시점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 중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쳐라' 식의 역사인식은 조금 곤란하다.
그래도 박노자는 성실하다. 내가 몇몇 사람들의 책을 몽땅 사 모으는 '전작주의'적 습성이 있어 그런지 한 사람이 같은 글을 여기저기 기고하는 걸 자주 발견하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성실한 필자를 만나면 점수를 많이 주고 싶어진다. 박노자의 건필을 빈다.
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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