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가장 소중하다"

[인터뷰] 생명 평화 탁발순례 떠나는 도법 스님

등록 2004.02.19 11:48수정 2004.02.24 13:39
0
원고료로 응원
a

보길도 동천다려에 오신 도법스님 ⓒ 강제윤

나는 늘 갈 수 없는 곳만을 그리워하며 걸어왔습니다. 평생을 잡을 수 없는 것들만을 잡으려고 손 내밀며 살아 왔습니다. 갈 수 없는 바다, 갈 수 없는 산과 사막, 갈 수 없는 하늘과 별들.

나는 내 곁에 늘 가까이 있는 것들을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는 존재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인 것을. 나를 살아 숨쉬게 하는 공기, 나를 먹이고, 발 딛고 살아가게 하는 땅을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잡히지 않는 바람, 뜬구름 같은 것들만을 그리워하느라 인생을 탕진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관계에 대해서도 그러했습니다. 항상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사람, 이 관계를 벗어나고자 애썼습니다. 공기처럼, 흙처럼 함께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기다려도 결코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가까운 사람을 상처 입혀 떠나보내곤 했습니다. 결코 오지 않을 내일을 열망하며 오늘을 배반했습니다. 내일이 없다는 것은 오늘을 함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닌 것을,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한 현존이므로, 지금 여기에 가장 진실 되고 충실해야 한다는 것임을, 나는 자주 잊고 살았습니다.

도법스님(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상임대표)이 보길도와 동천다려를 다녀가신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스님은 실상사 주지 직을 내려놓던 날 상좌 스님 몇 분과 훌쩍 건너 오셨습니다. 모처럼 무거운 마음도 내려놓고 보길도의 산과 바다와 들길을 거닐다 가셨지요.

지난 3년 동안 스님은 6·25전쟁 때 좌우이념 갈등으로 지리산 일대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1000일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진작부터 1000일 기도가 끝나면 한번 건너 오마 하셨는데, 마침 1000일 기도를 회향하고, 이 시대 '생명평화 운동의 발전소'인 실상사 주지라는 짐까지도 내려놓고, 빈 몸으로 오셨지요.

도법스님은 3월 1일부터 오랜 도반인 수경스님, 이원규 시인과 함께 탁발순례를 떠나실 예정입니다. 온 누리에 생명평화의 씨앗을 뿌리고자 떠나는 순례지만, 결국 스님의 순례는 지금 이곳, 이 자리, 걷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고자 함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탁발(托鉢)이란 스님들이 걸식으로 의식(衣食)을 해결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발(鉢)이란 음식을 담는 그릇인 발우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탁발이란 걸식하여 얻은 음식을 담은 발우에 목숨을 기탁한다는 뜻이니, 참으로 엄정한 계율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탁발을 하는 수행자는 더 이상 없습니다.

많은 성직, 수도자들이 낮은 자리에 임하기보다는 떠받들림 받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도법 스님의 탁발은 일상적 삶에서 생명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동시에 일정부분 수행자들의 잘못된 풍토를 타파하고자 하는 뜻으로도 읽혀집니다.

2박 3일 동안, 보길도의 백련암 터와 동천석실을 오르고, 보옥리 바닷가를 거닐며, 동천다려 다실에서 밤을 세워가며 도법 스님의 말씀을 듣고 기록했습니다.

a

동천다려에 담소중인 도법스님 ⓒ 강제윤

- 3월 1일부터 탁발 순례를 떠나실 계획이신데, 스님을 탁발 순례의 길에 나서게 만든 계기라든가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난 1000일 기도 기간 중에 이라크전쟁, 북한 핵 문제, 9·11테러 등이 터졌고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고조되면서 일상적 삶에서 평화 문제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모색하고 모색한 끝에 만난 친구가 생명평화입니다. 이것저것 포기하고 얻은 화두가 생명평화지요.

깨달음과 부처와 수행도 내려놓고 붙잡은 것이 생명평화입니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에게 지금 무엇보다 절박하고 절실한 것이 생명평화 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생명평화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생명평화를 찾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나를 탁발 순례의 길로 떠밀었습니다. 그저 걷고 또 걸을 생각입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생태민주주의나 지구민주주의와 같은 평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평화에 대한 위기를 느끼고 평화를 논하고 위기를 인식하는 움직임들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들이 지식인 집단이나 강단주의로만 흐르고 현장대중들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측면이 큽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떠한 논의도 공허합니다. 생명평화를 찾아 현장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탁발 순례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포장길도 흙 길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큰길도 골목길도 앞길도 뒷길도 가리지 않겠습니다. 술집 골목길도 시장 바닥 길도 피하 않겠습니다. "

-스님은 그저 생명평화를 찾아 걷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러신 줄 알겠습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그동안 해 오신 선우도량 활동이나 인드라망 생명 공동체 운동, 지리산 생명연대 운동, 지리산 평화 결사 운동 등, 오랜 기간 생명이라는 화두를 들고 정진해 오신 것을 되돌아 볼 때 스님이 그저 밥이나 빌고 사람 만나 생명평화를 찾아오겠다는 말씀은 지나친 겸양으로도 들립니다?
“생명평화를 찾아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나선다고 하지만 실상은 나 역시도 생명평화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지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평화를 구걸하기 위해 탁발의 길을 걸으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평화를 구걸하기 위해 온갖 사람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물론 생명 평화란 평화로운 삶의 문화를 가꾸어 낼 때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있습니다. 생명의 안전성과 건강성을 지킬 수 있는 생명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일상적 삶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탁발 순례가 생명평화의 문화를 싹틔우는 하나의 씨앗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또 하나 바람은 한반도에 위기 상황이 올 때 위기 해결을 위한 인적자원을 모으자는 생각도 있습니다.
일상적 삶에서 생명 평화사상을 실천하겠다고 서약할 10만 명만 모이면 한반도의 전쟁 위기가 극복되고 항구적 평화가 정착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결과나 소득에는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정직하고 성의 있게 해서 잘되면 좋고 안 되면 그저 공부하는 셈으로 치지요.”

-대중들이 구체적 삶 속에서 어떤 실천을 해야 생명평화가 얻어 질 수 있을까요?
“미워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미워하지 않으면 분쟁도, 분열도, 전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적 생활에서 미운 감정이 생긴다 해도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워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워하게 되면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으면 일상적 삶이 평화로워집니다. 실상 미워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미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관건이겠지요. 방법은 있습니다. 미움이 생기더라도 미움에 사로잡히거나 매달리지 말고 미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절실하게 고민하면 됩니다. 그래야 미움의 문제가 풀립니다. 진리란 그렇듯 단순 명쾌한 것입니다. 애매한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 순례 여정은 어떻게 잡으셨는지요?
“특별하게 짜여진 계획은 없습니다. 되는대로 걷고자 합니다. 일단은 3월 1일,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하여 구례, 하동, 산청 등 지리산 권역을 걸은 뒤 4.3의 현장인 제주도로 건너갔다가 매일 한 개 면씩 걸으며 북으로 거슬러 올라갈 생각입니다. 전국을 다 돌려면 3년이 걸릴지 5년이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탁발 순례가 생명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평화운동의 여정이기도 하지만 수행자로서 스님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듯도 합니다만?
“평화를 가꾸는 삶과 수행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걷고 또 걸으면서 깨달음이라는 환상을 쫓아온 그 간의 삶을 포기할 작정입니다. 부처라는 꿈을 쫓아온 집념을 내려놓고자 합니다.

이번 탁발 순례가 훌륭한 수행자라는 허상을 쫓아온 꿈을 접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가장 소중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훔치면 도둑놈이 되고 나누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단순한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면 편안해진다는 명료한 진리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별 세상도 없고 별 인간도 없습니다.

50대 중반이 되는 오늘날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 해 왔다고 믿었었는데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비로소 눈치챘습니다. ‘스님 훌륭하다’는 식의 덕담을 믿고 제 잘난 줄 알았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철들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정리하고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흉내 내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부처를 흉내 내서 이것도 빌고 저것도 비는 탁발을 나서기로 한 것이지요. 선재를 흉내 내서 동네방네 편력해 보려는 것이지요. 고상하게 말해서 탁발순례지 이실직고하자면 유랑 잡승의 길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길이 달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지요.“

-방금 깨달음이 환상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초월적 상태로서의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 종단의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으로도 들립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해탈, 깨달음의 상태가 초인적이고 신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이란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해탈이란 '썩은 밥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 고통을 받았으니, 썩은 밥을 먹으면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안 이상 두 번 다시 썩은 밥을 먹지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해탈한 부처가 썩은 밥이라는 제2의 화살을 받지 않는 존재라면 중생은 '습'에 이끌려 또다시 썩은 밥을 먹게 되는 존재일 뿐이지요. 그러니 해탈 했다해서 칼에 찔려도 고통을 모르고, 하늘을 날거나 기문 둔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을 신비화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상 종교가 아편 역할을 한 기간이 더 길었습니다. 아편이 순간순간 아픔을 잊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시키고 키우는 독약일 뿐입니다. 진정한 종교일수록 과학적 태도로 증명해 가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수행자도, 중생들도 해탈을 이룰 있을까요?
“그동안 많은 수행자들이 삶 자체를 초월하여 일거에 해탈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삶의 과정을 함부로 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한꺼번에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발상을 버려야 합니다. 추상적 해탈의 추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통한 해탈을 추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별 해탈(別解脫)을 추구해야 합니다. 별 해탈이란 모든 것, 즉 삶 자체를 초월하여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 사안에 따라 해탈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상적 사고와 삶 속에서 사안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탈을 이루어나갈 때 그것이 무르익고 무르익어 통일된 해탈의 삶에 이르게 됩니다. 양의 축적 없이 질적인 도약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별 해탈'은 일상적 삶의 문제가 수행의 문제라는 개념입니다.

스님의 말씀은 결국 인류가 지금 이곳, 이 자리 일상적 삶의 과정을 소중히 하고 평화를 가꾸는 것이 별 해탈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씀일 테지요. 그러고 보면 스님의 탁발 순례도 제2의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한 별 해탈의 수행이겠지요.

우리민족 구성원 각자가 생명평화라는 별 해탈을 얻어 나가다보면 통일된 해탈에 이르고 마침내는 한반도에서 6.25전쟁과 같은 제2의 화살도 피할 수 있다는 절실한 호소일 테지요. 중생도 해탈하여 부처 될 수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어떻든 도법 스님은 걸을 것이고 평화를 염원하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또한 탁발에 나선 스님이 이 땅의 대중들과 수행자들에게 참된 비구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을 믿습니다. 탁발 순례단이 따로 지원팀이나 수행팀의 원조를 받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걸망 매고, 발우 들고, 몸소 밥을 빌기도 하고, 밥을 짓기도 하면서 길을 가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스님의 순례에 기탁해 얼굴 알리고 표나 얻어 보려는 국회의원들, 정치 모리배들의 사진 찍기 방문도 일절 사절하셨으면 합니다. 스님은 누구나 만나시겠다고 하셨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만남이 아니라 만남의 훼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스님이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자비이기도 할 것입니다.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무조건 품어 안는 것이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라 때릴 때는 때리고 품어 안을 때는 품는 것이 자비라면, 이 땅의 생명평화를 위해 정치모리배들, 지금은 그들이 맞아야 할 때인 까닭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AD

AD

AD

인기기사

  1. 1 자식 '신불자' 만드는 부모들... "집 나올 때 인감과 통장 챙겼다"
  2. 2 10년 만에 8개 발전소... 1115명이 돈도 안 받고 만든 기적
  3. 3 김흥국 "'좌파 해병' 있다는 거, 나도 처음 알았다"
  4. 4 23만명 동의 윤 대통령 탄핵안, 법사위로 넘어갔다
  5. 5 김건희 여사 연루설과 해병대 훈련... 의심스럽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