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석 같은 남자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39>공장일기<24>

등록 2004.02.19 12:33수정 2004.02.1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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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출실에서 일할 당시 창원공단관리청 앞에서

사출실에서 일할 당시 창원공단관리청 앞에서 ⓒ 이종찬

퉁! 탕! 텅! 끼이익~
퉁! 탕! 텅! 끼이익~



사출실에서 나의 업무는 주로 금형을 설치하고 제품의 이상유무를 확인하여 주어진 생산량에 차질에 없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출실에 소속된 여성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다가 사출기에 문제가 있다고 호소하면 그 문제점을 재빨리 찾아내 해결해야 했다.

특히 내가 소속된 사출실에서는 정밀도 1000분의 3의 오차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톱니바퀴가 촘촘히 박힌 그런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 부서였다. 그러므로 사출실에 소속된 여성 노동자는 물론 나 또한 수시로 금형에서 떨어지는 플라스틱 제품의 이상유무를 철저히 확인해야만 했다.

게다가 제품의 재료가 플라스틱이다 보니 금형에 발사되는 액체 플라스틱의 압력과 냉각시간에 조그만 오차가 있어도 제품에 문제가 생기거나 금형의 핀이 부러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처음 금형을 갈아끼울 때 완벽하게 설치해 놓으면 가끔 제품의 이상유무만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왜냐하면 사출기는 한번 설치해 놓으면 전 자동으로 움직였으며 생산된 제품의 숫자까지 자동으로 기록되는 기계였기 때문이었다. 또 사출기는 제 홀로 열심히 제품을 생산하다가도 기계 내부에 문제가 생기거나 재료가 떨어지면 제 스스로 동작을 멈추고 경보등을 요란하게 울려댔다.

간혹 플라스틱 제품이 금형에 끼게 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사출실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주로 금형에서 떨어지는 플라스틱 제품의 이상유무를 확인하고 재료가 떨어질 때쯤이면 플라스틱 재료를 채워주는 일을 주로 했다. 그리고 생산된 제품을 검사한 뒤 숫자에 따라 포장지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여기! 여기요."
"??? 아니, 아무런 이상도 없잖아."
"머슨 문제가 있어서 부른 기 아이고예…."
"???"
"조퇴 좀…."


하루는 한창 작업 도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부서원 한 명이 급히 나를 불렀다. 나는 그때 속으로 '무슨 일이지? 또 금형핀이 부러졌나?' 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 하지만 금형과 제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퇴를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만 붉힐 뿐 조퇴하려는 까닭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재차 캐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커다란 두 눈동자에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을 하기라도 했나. 조퇴 이유를 알아야 결재를 맡든지 말든지 할 텐데.

그때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부서원 한 명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내 허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눈짓으로 저 쪽으로 가자고 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이 든 그 부서원을 따라가면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자 다른 부서원들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저들끼리 마구 킥킥거렸다.

"쟈(쟤)가 와 저라는지 참말로 모르겠심니꺼?"
"???"
"여자들 한 달에 한번씩 하는 그거로 진짜로 모릅니꺼?"


그랬다. 사출실에는 나와 부서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부서원들이 툭, 하면 어디가 아프다며 외출을 하거나 조퇴를 하는 까닭을 잘 몰랐다. 또 그럴 때마다 부서장이 두말 없이 외출이나 조퇴를 허락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당시 잔업과 철야근무를 밥 먹듯이 했던 공장에서 외출이나 조퇴를 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잔업이나 철야근무에서 한번 빠지려면 보름 전부터 미리 부서장에게 사유서를 꼼꼼히 적어 제출해도 허락받기가 쉽지 않은 그런 때였다.

"아항! 그라모 그렇타카모 되지, 말도 안 하고 울기는 바보 같이."
"아직 나이가 어린께네 지(제) 딴에는 그기 부끄럽다 아입니꺼. 그라고 쟈가 그 누구로 울매나 좋아하는데예."
"그 누구라니? 그라모 갸(걔)가 낼로 좋아한다 이 말입니꺼?"
"목석 같은 남자…. 앞으로는 갸한테 특별히 신경 좀 써 주이소. 그라고 갸는 전에부터 생리통이 심해가꼬 자주 조퇴로 했다 아입니꺼."


미안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에 대한 사유를 꼬치꼬치 캐물었으니, 나이 어린 그녀로서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만도 했다. 게다가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그런 자신의 심정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추궁만 했으니, 속으로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했지 않겠는가. 등을 토닥이며 어서 가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그라모 부서장한테는 뭐라고 보고로 하지?"
"고마 두통이 심해서 병원에 보낸다 카이소."


그랬다. 사출실은 겉으로 보기에는 출입통제구역인데다 작업장 내부도 아주 깨끗하게 보였지만 작업환경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특히 불량품이나 플라스틱 찌꺼기를 분쇄할 때면 분쇄기 주변에 날아다니는 플라스틱 먼지가 심했다. 또 사출기에서 진종일 풍기는 플라스틱 가스를 대책없이 맡아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사출실에 소속된 여성 노동자들은 생리통만 심했던 것이 아니라 생리주기도 일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플라스틱 먼지와 가스를 마시면서도 툭 하면 밤낮이 뒤바뀌는 불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오죽 공장 일이 바빴으면 생리대를 사러 갈 시간조차 없어 부서원끼리 빌려쓴다고 했겠는가.

그래. 지금도 나는 그 때 생각만 하면 마음이 몹시 슬퍼진다. 그리고 원망스런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며 쌍거풀 예쁘게 진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던 열여섯 먹은 그 소녀가 생각난다. 그 소녀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 그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 치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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