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기를 끌기 시작하고 있는 분홍색 호접난김명곤
맨처음 이곳에 화초 농장을 가꾼 사람은 임성기씨로, 30여년전에 정착해 화초 농사를 짓다 5년전에 이곳을 떠났다. 은퇴의사인 권경민(65) 박사는 현재 이곳에서 고참에 속한다. 권 박사는 1969년에 이곳에 와서 플로리다 병원 마취과 의사로 일하다 먼저 소일거리로 화초 농사를 시작한 간호사 아내의 권유로 1976년부터 농사꾼이 되었다.
그는 "의사 수입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스트레스는 훨씬 적다"고 말한다. 그의 아들 권오상(35)씨도 부근에서 화초농사를 짓는다. 캘리포니아에서 보험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이 곳에 농장을 차린지 3년 정도 되었는데, "수입도 훨씬 좋고 마음도 편하다"고 했다.
2년전에 문을 연 신참 구영복씨는 "시작해 보니 이것(화초농사)이야 말로 내 적성에 딱 맞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스트레스 적어서 아주 좋다"고 누차 강조했다. 권오상씨는 "스트레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다른 직업에 비해 적은 편"이라고 고쳐 말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에서 흔한 화초인 골드 포터스 류의 농사는 분명 스트레스 없는 농사에 속했다. 자라는 족족 팔려 나가고, 물량이 딸려서 못팔 지경이니 말이다.
그러나 최근에 한국에서 파견나와 호접난 농사를 짓는 측은 얘기가 달랐다. 한국에서 5명이 투자했고, 울산시로부터 1억4000여만원을 지원 받아 3년째 호접난 농사를 짓는 울산 난수출 영농조합원 황병구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다"고 말한다.
황씨는 우선 언어장벽으로 다른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미국 현지의 유통 과정과 판로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가 힘드는 등 애로가 많다고 고백했다. 그는 "캄캄한 밤을 헤매다 이제 겨우 빛을 조금씩 보는 기분"이라고 최근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황씨는 2001년 3월 3일 이곳에 도착했는데, 첫해는 건축하고, 둘째해는 재배하고, 3년째 들어서 팔기 시작했는데, 30만주를 재배해 지난해에 10만주를 팔았다고 한다. 주변에서 신제품을 시작해 그 정도 했으면 대단한 성과라며 격려했고, 황씩 스스로도 대견한 일 이라고 인정하기는 했으나, 황씨의 눈빛과 표정에서 여전히 스트레스가 묻어 나왔다.
이날 황씨는 자신의 호접난 농장에서 대략 7종류의 소담스럽고 우아한 한국산 호접난을 보여 주면서 미국산보다 꽃송이도 크고 훨씬 질이 좋아 일단 한번 가져간 구매자는 반드시 다시 찾는다고 말했다.
문제는 소량 구매자보다는 퍼블릭스, 윈딕시, 홈디포 등 대량 구매자를 붙잡아야 하는 것인데, 현재의 물량으로는 납품교섭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적어도 100만주 이상을 생산할 수 있어야 말을 붙여 볼 수 있다고.
황씨의 다른 애로점은 2년전에 비해 호접난 가격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대만과 덴마크 등지의 호접난이 들어 오면서 2년전에 10불을 호가하던 것이 지금은 8, 9불로 떨어진 것. 그래서 황씨는 생산 원가를 줄이기 위해 한국에서 값도 싸고 물류 비용도 적게 드는 2~3개월 된 병아리 호접난을 가져다 키울 요량이다.